핀포인트뉴스 산업부 손예지 기자
"파티 용품으로 가득 찬 거실을 그려줘."
최근 열린 한 국내 기업의 TV 신제품 설명회장. 담당자의 음성 명령이 떨어지자, 오렌지색 벽에 알록달록한 풍선과 선물이 가득한 방 사진이 곧장 화면을 메웠다.
이날 제조사 측은 시연을 진행하면서 신제품에 무려 5가지 인공지능(AI) 기능이 탑재됐다고 강조했다. 화려한 볼거리임은 분명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해당 기능들이 기존 생성형 AI의 이미지·음원 생성 기능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TV라는 폼팩터의 진화라기엔 어딘가 부족한, 현재 가전 시장에 불고 있는 AI 열풍의 단면이다.
바야흐로 인공지능 시대다. 전 세계적인 붐을 타고 가전업계에도 'AI 탑재'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삼성전자와 LG전자를 비롯한 주요 가전 기업 역시 세탁기부터 정수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군에 앞다퉈 AI를 이식하며 저마다 '똑똑한 가전'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문제는 이 기술들이 실제 소비자의 일상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느냐다. "처음엔 신기해서 이것저것 해봤지만, 지금은 그런 기능이 있구나 생각만 할 뿐 직접 쓰지는 않는다." 최근 최신형 스마트 가전을 구매한 한 지인의 후기다. 혁신의 상징이어야 할 AI가 허울만 좋고, 막상 있어도 크게 쓸모없는 '빛 좋은 개살구' 취급을 받고 있는 셈이다.
각종 지표도 이 같은 대중의 냉정한 평가를 뒷받침한다. 한 국내 조사업체에 따르면 스마트 기능이 탑재된 가전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실제로는 원격 전원 조작이나 상태 확인 등 기본적인 기능만 사용하는 경우가 절반(53.1%)을 넘어섰다. 아예 연동조차 안 하는 비율도 42.8%에 달했다. "수동 조작이 더 편하고 브랜드마다 앱이 달라 귀찮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실효성보다 'AI 탑재'라는 구색 맞추기에 급급하다 보니 웃지 못할 촌극도 빚어진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서 타이머나 센서 같은 단순한 기능을 AI로 과장해 광고한 이른바 'AI 워싱(AI-Washing)' 사례가 무더기로 적발된 것이다. '무조건 AI를 넣어야 한다'는 업계의 강박이 낳은 결과다.
소비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기기의 본질과 무관하게 억지로 욱여넣은 AI는 기기 값만 올리고 구동만 느려지게 만들 뿐이다. 제조사들은 트렌드에 편승하기 위한 억지스러운 곁가지 기능으로 포장할 것이 아니라, 기기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사용자의 일상을 매끄럽게 보조하는 방향으로 고민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결국 해답은 기본에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삶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진정한 의미의 효용을 제공할 때, 비로소 가전 속 AI는 무늬만 혁신이라는 오명을 벗고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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