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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금요수필] 연둣빛, 내 마음의 숲에 물든다.

오월 초의 숲은 화가가 갓 짜놓은 물감처럼 싱그럽다. 겨우내 묵은 때를 벗겨낸 대지 위로 봄비가 한 차례 다녀가면, 세상은 온통 ‘연두’라는 이름의 투명한 수채화로 변모한다. 나는 이 시기의 숲을 사랑한다.

[금요수필] 연둣빛, 내 마음의 숲에 물든다.

[금요수필] 연둣빛, 내 마음의 숲에 물든다.

이종순

이종근

2026년 05월 28일 16:22

승인

2026년 05월 28일 18:32

오월 초의 숲은 화가가 갓 짜놓은 물감처럼 싱그럽다. 겨우내 묵은 때를 벗겨낸 대지 위로 봄비가 한 차례 다녀가면, 세상은 온통 ‘연두’라는 이름의 투명한 수채화로 변모한다. 나는 이 시기의 숲을 사랑한다. 진초록의 완숙함이 주는 묵직함 대신, 이제 막 생의 첫걸음을 뗀 어린 잎사귀들이 내뿜는 수줍고도 당당한 빛깔. 그것은 빛나는 색(色)이라기보다 차라리 빛에 가까운, 영혼의 떨림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오월의 바람의 끝에서 비릿한 흙내음 대신 달콤한 식물의 숨결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는 습관처럼 숲으로 향한다. 앙상하던 나뭇가지 끝에 맺힌 연둣빛 몽우리들은 마치 신이 공들여 쓴 비공개 일기장 같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채 겨우내 안으로만 꾹꾹 눌러 쓴 고독의 문장들이, 따스한 햇살의 간지럼에 못 이겨 한 장씩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연약한 잎사귀 하나에 맺힌 실핏줄 같은 잎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안의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의 문장들도 말랑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 든다.

수채화의 매력은 ‘번짐’과 ‘투명함’에 있다. 이 계절의 연둣빛이 그러하다. 그것은 앞선 색을 완전히 덮어버리는 유채화의 오만함이 없다. 먼저 피어난 목련의 흰 그늘은 투명하고, 발치에 머문 이끼의 낮은 숨소리를 보듬으며, 붓질 한 번에 맑은 물기가 배어 나오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천을 물들인다.

글을 쓴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또한 이 연둣빛 번짐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상대의 색을 지우지 않으면서 나의 빛깔을 조심스럽게 나누어 가지는 일, 그리하여 마침내 서로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그 지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의 한 장면이 완성되는 법이다.

때때로 삶은 짙은 회색의 소묘처럼 느겨질 때가 있다. 책임이라는 무게에 짓눌리고, 성취라는 강박에 쫓기다 보면 우리 마음의 캔버스는 어느덧 무채색의 건조한 풍경화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오월의 숲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비바람에 꺾인 가지라도 그 끝에는 어김없이 연둣빛에 희망이 맺힌다고. 비록 지금은 작고 미약한 연둣빛 점 하나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모여 산을 이루고 마침내 세상을 녹색의 향연으로 인도하듯, 우리 삶의 작은 시도들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숲은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숲길을 내려오는 길, 내 옷자락에도 어느덧 연둣빛 향기가 배어든 듯하다. 햇살 아래 투명하게 빛나던 그 잎사귀들이 이제 내 마음속에서 한 편의 수필이 되어 흐른다. 거창한 수사나 화려한 미사여구는 필요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생명을 긍정하고, 갓, 태어난 잎의 순수함을 닮으려 애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당신은 이 계절, 지금 어떤 빛깔로 번져가고 있는가. 만약 고단한 일상에 지쳐 마음이 메말라 있다면, 잠시 멈춰 서서 가까운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길 권 한다. 가지 끝에 매달린 그 여린 연둣빛 수채화가 당신의 상처 난 가슴을 조용히 적셔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투명한 용기를 건네는 계절이기에.

나의 펜 끝에도 이제 연둣빛 물기가 어린다. 이 맑은 수채화가 우리들의 가슴 속에 닿아, 잊고 지냈던 설렘 한 자락을 깨울 수 있다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다. 오월의 정령이 그린 가장 눈부신 연작(連作), 이곳 숲에서 나는 오늘도 생의 가장 아름다운 문장 한 줄을 길어 올린다.

이종순 수필가는

'문예사조'로 수필 등단, '시조문학'으로 시조시인 등단

문학박사. 우석대학교 대학원 외래교수

한국국보문학 시조부문 대상 수상

교육부 유보통합 연구진 교육부장관상 수상

'창의 숲 연구소'와 '아이가 크는 숲'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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