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바·폴라포 포장지 버리며
코끼리의 눈물·돌고래의 죽음
내 더위 식히려 더 뜨거워졌을
누군가의 고통도 함께 버린다
최정화 소설가
긴 여름 끝, 입맛이 없어져서 소울푸드를 찾는다. 아삭거리는 제철 채소다. 시원한 미역냉국, 아삭하고 푸릇푸릇한 오이고추, 짭짤한 오이지 무침만 있으면 밥 한그릇을 당장 뚝딱 비울 수 있다. 여름식탁을 준비하는 마음은 소박하다. 보도블록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포대에 담아온 제철 먹거리들을 바구니에 꺼내 담아놓은, 천원에서 오천원 사이면 과일이며 채소들을 한 보따리 얻어갈 수 있는 길거리 행상을 자주 찾는다. 파라솔 하나 없이 건물 외벽에 드리운 네모난 그림자에 기대 한여름 땡볕 더위를 견디며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꼬부랑 할머니들이 상추며 오이, 토마토 같은 자잘한 먹거리들을 펼친다.
쿠팡보다 마트, 마트보다 동네 슈퍼, 슈퍼보다 시장, 시장보다 행상을 선호한다.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서 먹는 일, 입는 일, 사는 일, 버리는 일을 의식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면서 손가락만 바삐 움직여 휴대전화로 하는 쇼핑은 편리하지만, 뜨거운 여름에도 쉬지 못하고 숨가쁘게 달리는 쿠팡 기사님들의 수고가 떠오르자 구매버튼을 누르려다가 이내 그만둔다.
이미 돈 많이 번 이들의 배를 한 번 더 불리기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가난한 이웃의 짐을 덜어주고 싶다. 분해되지 않는 플라스틱 소재로 깔끔하게 일회용 포장된 음식보다 못생기고 상처 난 자연의 먹거리에 더 손이 간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세일 상품을 이용하면 절약도 할 수 있고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를 줄일 수 있다.
엊그제는 아삭거리는 오이고추에 고소한 된장을 찍어 먹고 싶어져서 길거리로 나갔다. 돗자리 위에 펼쳐놓으신 것들을 모조리 팔아도 총합이 얼마 되지 않을 게 뻔하다. 그래서 괜히 더 산다. 오이를 사러 갔다가 고추도 사고, 복숭아를 사다가 자두도 사고. 기스 난 플라스틱 바구니 위에 쌓여있는 건강한 먹거리를 사면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진다. 내가 조금 더 걷고 조금 더 무거워지고 조금 더 불편해지면 누군가를 해하지 않고 도우며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도 덤으로 얻는다.
오이고추 한 바가지를 준비해 간 에코백에 담아 기분 좋게 돌아서려는 찰나, 할머니의 움직임이 뭔가 수상쩍어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는 지금 막 오이고추를 비워낸 바구니에 다시 오이고추를 담고 계셨다.
예상치 못한 장면이 이어졌다. 할머니의 손에 일회용 플라스틱 상자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돗자리 옆에 세워져 있던 포대 안에는 일회용 플라스틱에 담긴 오이고추가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플라스틱 상자에서 오이고추를 꺼낸 뒤에, 상자는 버리고 오이고추만 바구니에 옮겨 담으셨다.
“요즘은 다 플라스틱 박스야. 쓰레기만 더 생기는데 왜 다 이렇게 포장해서 파는 거지?”
혼잣말을 하시며 바구니에 옮겨담은 오이고추를 다시 돗자리 위에 내려놓으시는 할머니에게 “그러게 말이에요”라고 한 마디 덧붙이고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직접 농사지어 파는 먹거리가 아니어서 실망하고 과대 포장된 일회용 쓰레기를 줄였다는 뿌듯함이 사라져서 아쉬워하면서.
에코백에서 오이고추와 된장을 꺼내 저녁 식탁을 차린다. 비닐 포장되어 있던 누룽지, 일회용 유리용기에 담겨있던 명이나물, 플라스틱 용기에 포장되었던 낙지젓을 꺼내 접시 위에 옮겨 담는다. “왜 다 일회용기에 포장해서 파는 거지?” 할머니처럼 혼잣말을 하면서.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식탁 위에 도착한 먹거리는 하나도 없었다. 밥을 한 숟갈 뜰 때마다 자꾸만 올 초에 본 티브이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비닐봉지를 삼키고 쓰러진 코끼리가 흘린 눈물이 떠오르자 밥알이 씹히지 않고 혀 위를 굴러다녔다.
디저트는 냉동실에 얼려둔 아이스크림이다. 커피향이 나는 하드바, 초코시럽이 뿌려진 부드러운 바닐라 콘, 시원한 얼음 씹는 재미가 있는 포도맛 폴라포. 비닐 포장지를 벗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면서 내 더위를 식히기 위해 더 뜨거워져야 했을 다른 누군가의 고통도 함께 버린다. 코끼리의 눈물, 새의 슬픔, 돌고래의 죽음을, 올여름은 작년보다 더 더워졌다는 이유로 쉽게 잊는다.
/최정화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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