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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026 박정희] (60) 전쟁 폐허서 피어난 문화 씨앗...서울 상경한 청춘들의 뜨거운 욕망, 대중문화 꽃피우다

1964년 제11회 아시아영화제 참가대표자들을 접견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1960년대 근대도시로 탄생한 서울

계층 상승 희망 품고 사람들 몰려들어

라디오·TV 등 미디어 매체 개국 정비

대중문화 전국적 확산 토양 마련

백화점·다방·주점·영화관 밀집한 명동

종합 문화 공간·예술인 아지트 역할

1964년 제11회 아시아영화제 참가대표자들을 접견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1960년대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열쇠는 ‘도시’와 ‘대중’이다. 6·25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일어선 대한민국의 중심에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있었고, 그곳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만들어낸 에너지가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토양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대중문화를 논할 때, 많은 연구자들은 검열과 규제에 초점을 맞춰왔다. 물론 그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한 문화 현장은 어땠을까? 놀랍게도 그곳은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로 넘쳐났다. 이번 글에서는 그 시대의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도시의 탄생, 대중의 탄생

대중문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도시라는 공간이다. 근대의 등장은 도시를 만들었고, 도시는 대중을 만들었으며, 대중은 문화를 이끌었다. 도시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다양한 정보들은 신문, 잡지, 라디오, TV 등 매스 미디어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1960년대 들어 근대 도시로 탄생한 서울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통계가 이를 말해준다. 서울 인구는 1966년 전국 인구의 13%에 달했고, 1975년에는 약 20%에 이르렀다.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선택한 곳은 서울이었다. 가난했지만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더 나은 인생을 꿈꾸며 도시를 선택했다.

이 시기 미디어 체제도 정비되었다. 문화라디오(1961년), 동아라디오(1963년), 동양라디오(1964년), KBS TV(1961년), 민간방송 TBC TV(1964년), MBC TV(1970년)가 개국하며 대중문화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통로가 되었다.

◇‘서울은 만원이다’ - 희망의 공간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는 1966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서울이 만원이어서 가난해진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희망을 찾아 서울로 몰려와 만원이 된 것이다.

당시 대중가요는 이런 분위기를 잘 반영했다. 이 시스터즈의 ‘서울 아가씨’에서 서울의 아가씨는 “명랑하고 사랑스러우며 예쁘고 상냥”했다. 남진의 데뷔곡 ‘서울 플레이보이’(1965년), ‘해피 서울’ 등의 노래 제목만 봐도 당시 서울이 어떤 공간으로 인식되었는지 알 수 있다.

서울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 계층 상승이 가능한 곳이었다. KBS 연속극 주제가였던 ‘회전의자’(1964년)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유행어를 낳았고, 이는 당시 사람들의 열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상국이 부른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1965년 KBS 가요 퍼레이드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가사에서 들리는 호탕한 웃음소리는 비록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자신감을 오롯이 느끼게 해주었다.

영화 ‘팔도강산’이 상영되는 영화관 앞에 운집한 사람들.

◇명동 - 문화와 소비의 중심지

‘님 서울 꽃 서울’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보면 1절에 화신과 종로, 2절에 명동과 다방, 3절에 창경원과 충무로가 등장한다. 이 공간들은 당시 서울 대중들이 근대화를 직접 경험하고 향유했던 장소들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명동은 다양한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번화가로 자리 잡았다. 화신백화점은 근대 백화점의 조건을 갖춘, 조선인이 설립한 최초의 백화점이었다. 백화점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곳이 아니라 근대 문화를 만나고 체험하는 장소, 일종의 종합 문화 공간이었다.

6·25 전쟁 이후 명동의 다방과 주점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1962년 재건사업 완료 후 오양빌딩, 중앙극장(1963년), 유네스코 회관(1966년), 대연각호텔(1968년) 등이 들어섰고, 각종 정부 부처와 금융기관이 밀집하면서 명동은 서울의 핵심 공간으로 떠올랐다.

특히 양장점의 증가가 주목할 만하다. 1955년 6개였던 양장점은 1971년 150여 개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새로운 패션 문화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졌다.

미용업계도 큰 성장을 보여 이·미용사가 1960년 1만 866명에서 1966년 3만 8천 761명으로 3.5배 증가했다. 일하게 된 여성들은 여가 활동으로 음악 감상과 영화 관람을 즐겼다. 도시의 번영이 문화의 번영을 가져온 것이다.

무교동 ‘쎄시봉’ 음악 감상실 탄생

라이브 팝송·통기타·포크 문화 활성화

1969년 한 해 한국영화 233편 제작

총 관객수 1억 7천800만 명 기록

근대화·도시·시장경제가 만든 역동성

오늘날 대한민국 대중문화 토양 다져

◇쎄시봉과 새로운 음악 문화

1960년대 초반 서울 중심가에 젊은이들을 상대로 하는 음악 감상실이 생기면서 문화의 지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기성세대들의 클래식 감상이 1950년대를 지배했다면, 1960년대 들어서는 젊은이들 주도하에 팝송을 라이브 음악으로 감상하는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다.

1963년 무교동에 정착한 쎄시봉은 단순한 음악 감상실을 넘어 문화 창조의 공간이었다. 1964년 4월 TBC-TV PD 이백천이 직접 마이크를 들고 청중 속을 누비며 음악 신청을 받고 이야기를 나누는 ‘Dance with Petit Lee’라는 프로그램이 청중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쎄시봉은 요일별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월요일 ‘성점 감상실’에서는 새로 발표된 음악을 듣고 평가했다. 수요일 ‘시인 만세’에는 서정주, 박목월, 박재삼 같은 시인들을 초청했다. 금요일 ‘대학생의 밤’에는 각 대학의 통기타 마니아들이 모였고, 송창식과 윤형주의 역사적인 만남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비정기 프로그램으로는 ‘즉흥 스테이지’, ‘신곡 합평회’ 등이 있었다. 1965년에는 ‘리버풀 비틀즈’라는 영국 록밴드를 초청해 경복궁에서 라이브 공연을 벌이는 파격적인 기획도 선보였다. 쎄시봉은 끼 있는 신인들을 발굴하는 등용문이기도 했다.

TBC의 ‘쇼쇼쇼’ 담당 PD 조용호는 쎄시봉에서 눈여겨보았던 조영남을 발탁해 TV에 출연시켰고, 조영남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쎄시봉은 1969년 문을 닫았지만, 이후 그 정신은 오비스캐빈으로 이어졌다.

1968년 7월 안양 필름촬영소 건물 모습.

◇영화산업의 황금기

1960년대는 양적, 질적으로 풍부한 영화가 다양하게 제작되어 ‘영화 르네상스 시기’라고 불린다. 1969년 한 해에만 대한민국 영화 233편이 제작되었고, 총관객 수는 무려 1억 7천800만 명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극장 수도 1958년 242개에서 1971년 717개로 3배 가까이 늘어났다. 당시 영화들은 시대의 열망을 담아냈다. ‘서울은 만원이다’(1966년)는 상경한 사람들의 애환을, ‘회전의자’(1966년)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메시지와 함께 계층 상승의 욕망을,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1965년)는 희망을 잃지 않는 서민의 모습을 그려냈다.

◇청년문화의 탄생

1969년부터 젊은이들이 대중문화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다. 1966년부터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 페스티벌’이 시민회관에서 열렸고, 1969년에는 ‘플레이보이컵 쟁탈 보컬그룹 경연대회’가 개최되었다. 1970년에는 ‘후트내니 고고고’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포크 페스티벌이 열렸다.

방송사들도 신인 발굴에 나섰다. MBC-TV는 1970년 ‘노래의 타이틀 매치’라는 가수 등용문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KBS에서도 1970년부터 ‘KBS배 쟁탈 전국노래자랑’이 시작되었다. 1972년 한 해 동안 5만 4천여 명이 응모했고, 예비심사를 거쳐 520여 명이 방송에 출연했다.

1971년 여름, 경기도 청평에서 ‘제1회 청평페스티벌’이 열렸다. 8월 17일부터 22일까지 엿새 동안 열린 최초의 야외축제로 수용 인원 3천 명을 예상했으나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렸다. 청평페스티벌은 1979년 ‘강변가요제’로 바뀌어 2010년까지 이어졌다.

특히 주목할 점은 대학생들이 이끈 신문화다. 쎄시봉의 조영남(서울대), 윤형주(연세대), 이장희(연세대)뿐만 아니라 양희은(서강대), 김민기(서울대) 등 이른바 ‘학사 가수’들이 인기를 끌었다. 미군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파된 미국 노래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 이들이 바로 영어를 할 수 있는 엘리트 대학생들이었다.

이는 1930년대 트로트를 작곡한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통해 작곡가로 성장하거나 국내에서 서양악기와 음악 이론을 배운 엘리트들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문화는 늘 교육받은 엘리트들에 의해 선도되고, 이후 대중으로 확산되는 패턴을 보여준다.

1966년 제13회 아시아영화제에 참석한 각국 배우들.

◇관광과 여가 문화의 확산

영화 ‘와룡선생 상경기’(1962년)는 시골 학교 교장이 퇴임 후 서울에 있는 제자들을 만나러 상경하는 내용을 담았다. 오늘날 관광은 일상적이지만, 관광이야말로 근대의 산물이다. 자발적 이동의 자유는 근대 도시가 생기기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팔도강산’(1967년)은 노부부가 전국에 흩어져 사는 6남매를 만나기 위해 유람을 떠나는 내용이다. 공보부 제작 영화라는 점에서 국책 홍보 영화로 평가되지만, 당시 대중들은 스크린을 통해 펼쳐지는 전국 유람 그 자체만으로 근대 관광 문화를 향유했다.

흥행 이후 ‘팔도’라는 키워드 자체가 흥행의 보증수표가 되었다. 후속 시리즈 영화가 다수 제작되었고, 신세계백화점에서는 ‘팔도 별미 잔치’라는 행사를 기획해 각 도의 특산물과 음식을 층별로 선보였다.

‘속 팔도강산 - 세계를 간다’(1968년)에서는 독일 파견 광부, 베트남 파병군인 등 해외에서 활약 중인 한국인들의 모습을 담았다. 국내 여행조차 갓 시작되었던 시절, 세계 여행은 일반인들에게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스크린을 통한 간접 경험이지만, 이는 대중들의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어린이 문화도 이 시기 탄생했다. 1973년 어린이대공원이 개원하면서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최초의 야외공원이 마련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개원식 축사에서 “오늘 마침 이 어린이대공원이 개장되어 여러분들이 마음껏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시장과 자본주의가 만든 문화

토머스 칼라일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라고 했던 셰익스피어도 당대에는 대중에게 인기를 누렸지만, 고급문화로 여겨지지 않았다. 비평가들은 그의 연극을 ‘저속하다’라고 여겼다. 시간이 흘러 출판 시장이 성장한 후에야 셰익스피어는 ‘서구문화의 정전’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제 유일한 목표는 그저 벌 수 있을 만큼 버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글이나 음악을 생산해낸 예술가들이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에 호응하는 소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소비자와 예술가의 취향을 더욱 세련되게 하고 잊혀진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고 복원하여 널리 알린다”라며 “생산적인 부가 문화 생산의 동반자”임을 역설했다.

찰리 채플린도 “전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는데 거기서 예술이 생겨났어요.”라고 말했다. 명동 다방에서 일하며 등록금을 벌고 빚을 청산한 대학생 예술인들, 음악 시장의 성장과 함께 자란 우리 대중음악과 문화가 이를 증명한다.

◇재평가가 필요한 시대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대중문화를 다룬 많은 연구들은 관련 정책이나 제재에 초점을 맞춰 부정적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맞다, 그 시기에는 검열이 존재했다. 미니스커트와 장발도 단속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명동에서 장발을 단속당하는 사진을 자세히 보면, 경찰 뒤로 오비스캐빈이 보이고 양장점이 보인다. 단속을 바라보는 여성의 패션도, 단속당하는 남성의 패션도 예사롭지 않다. 새로운 문화와 예술로 거리가 가득 차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등장했던 시기였다.

자유로운 문화를 억압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로운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자유로운 문화의 숲은 어떻게 자라났는가. 근대화와 도시, 그 속의 시장이 만들어낸 씨앗에서 출발했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것들의 씨앗은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뿌려졌다.

2013년 방탄소년단(BTS)이 발표한 ‘팔도강산’은 각 지역의 사투리로 펼쳐지는 랩의 향연이다. 이런 대중문화의 확대는 대중의 확대를 전제하고, 대중의 확대는 공간, 교통, 미디어의 확대 등 근대 도시의 토양에서 자란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는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만으로 평가될 수 없다. 이 땅에 ‘시장’의 기회를 여러 곳에 뿌린 것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편견을 걷어내고 당시의 실제 대중문화가 어떠했는지, 그 자체를 바라봄으로써 그 시대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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