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매매 신고제 등 보호법 제정·공포
지방관리사무소·박물관 건립 등 ‘성과’
인간문화재 기능보유자에 생활비 지급
석굴암 보수, 국제기구와 협력 첫 사례
외화 획득·국가 이미지 제고 적극 활용
도시개발·고속도로 건설 때 훼손 많아
전문성 갖춘 과학자·기술자 부족 ‘한계’
무형문화재 제도 영향 유네스코와 협약
1978년 부산 충렬사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준공식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박정희 대통령 재임 18년은 대한민국 문화유산 보호의 근대적 체계가 완성된 전환점이었다. 6·25 전쟁으로 황폐화된 문화재 현장에서 출발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수천 건의 문화재를 지정·보존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화재보호 시스템의 골격을 만들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됐고, 일부 복원 사업에서는 고증 문제가 불거졌다. 개발과 보존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난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이후 세대가 문화재를 더 잘 보존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 보호의 법적 기틀을 세우다
박정희 대통령이 문화재 정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5·16 직후인 1961년부터였다. 대한민국전쟁으로 전국의 문화재가 심각하게 파괴됐고, 생계가 막막한 상황에서 도굴과 밀매가 성행했다. 1961년 10월 문화재관리국을 신설하고, 이듬해 1962년 1월 10일 문화재보호법을 제정·공포했다.
문화재보호법은 총 8장 48개 조항으로 구성됐다. 문화재를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등 4개 유형으로 분류했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중요무형문화재, 중요민속자료로 세분화 되었고, 시·도지정문화재 제도도 함께 마련됐다.
특히 중요한 것은 문화재 매매 신고제 도입과 국가지정문화재의 해외 반출 원칙적 금지였다. 문화재를 훼손하거나 허가 없이 반출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징역형과 벌금형을 규정해 강력히 처벌하도록 했다. 문화재 전문가들로 구성된 문화재위원회도 설치돼 문화재 지정, 해제, 보존, 관리 등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하게 됐다.
법 제정과 함께 행정조직도 대폭 확충됐다. 1961년 문교부 외청으로 출범한 문화재관리국은 초대 국장에 최순우가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김원룡, 황수영 등 고고학과 미술사학 분야의 석학들이 국장과 주요 보직을 맡으며 전문성을 높였다. 경주, 부여, 공주 등 문화재 밀집 지역에는 지방문화재관리사무소가 설치됐다.
◇1만여 건 문화재 지정, 불교 문화재의 재발견
문화재보호법 제정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문화재 지정이 대폭 늘어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보물은 400여 점에 불과했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기 국보와 보물은 수천 점으로 급증했다. 1962년 12월 제1차 국보·보물 일제 지정 때 국보 116건, 보물 906건이 한꺼번에 지정됐다.
특히 조선시대 유교 중심 정책으로 소외됐던 불교 문화재가 대거 재발견됐다.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 문화재 대부분이 이 시기에 국보로 지정됐다. 전국 사찰에 소장된 불상, 불화, 범종, 탱화 등도 체계적으로 조사돼 보물로 지정됐다.
회화 분야에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정선의 산수화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됐다. 공예 분야에서는 고려청자, 분청사기, 조선백자가 대거 보물로 지정됐다. 전적 분야에서는 직지심체요절(1972년 지정), 훈민정음 등이 지정됐다. 사적 지정도 활발히 이뤄졌다. 삼국시대 고분군, 산성, 궁궐터, 조선시대 관아지, 서원, 향교 등이 사적으로 지정돼 보호받기 시작했다. 경주 대릉원 일대, 공주 송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 고분군 등 주요 고분군이 이 시기에 사적으로 지정됐다.
1979년까지 국보 약 200건, 보물 약 800건, 사적 약 200건, 천연기념물 약 250건 등 총 1천500건 이상의 국가지정문화재가 지정됐다. 시·도지정문화재까지 합하면 1만여 건에 달했다.
1973년 7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지역 유적 발굴조사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무형문화재 제도, 세계가 주목한 혁신
1964년 시행된 무형문화재 제도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 문화재 정책의 가장 큰 성과로 꼽힌다. 일본의 ‘인간국보’ 제도를 참고했지만, 대한민국 실정에 맞게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네스코가 2003년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을 채택하기 40년 전에 이미 무형문화재 보호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1964년 12월 첫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때 양주별산대놀이, 남사당놀이, 판소리 등 11개 종목이 지정됐다. 이후 가곡, 대금정악, 피리정악 등 전통 음악,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 전통 무용이 줄줄이 지정됐다. 공예기술 분야에서는 나전칠기장, 소목장, 입사장, 주철장 등이 지정됐다.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기능 보유자에게는 월 생활비가 지급됐다. 1960년대 중반 월 5,000원에서 시작해 1970년대 후반에는 월 10만 원 수준으로 인상됐다. 당시 공무원 초봉이 2만~3만 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수준이었다.
종묘제례악의 경우 이왕직아악부 출신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기능 보유자가 지정됐고, 판소리는 박동진, 김소희, 박초월 등 명창들이 각 유파별로 지정됐다.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1967년 문을 연 국립무형문화재전수회관은 인간문화재들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공연을 올리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고궁 복원의 명암, 광화문 논란
고궁 복원 사업은 성과와 논란을 동시에 낳았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광화문 복원이었다. 일제가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헐어버린 광화문을 1968년 복원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다.
하지만 복원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원래 광화문은 경복궁 남쪽 중앙에 위치했지만, 복원된 광화문은 동쪽으로 약 10미터 이동해 건립됐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피해 배치한 것이었다. 더욱 큰 논란은 목조 건축물이었던 광화문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건축한 것이었다. 예산 절감과 공기 단축이 이유였지만, 역사적 고증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1968년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준공식이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의 얼을 되찾는 뜻깊은 날”이라고 했지만, 문화재 전문가들은 “역사 왜곡”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 광화문은 2006년 철거됐고, 2010년 원래 위치에 목조로 재복원됐다.
경복궁 내 다른 전각들도 복원됐다. 경회루는 1960년대 후반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1970년 일반에 공개됐다. 근정전, 사정전 등 주요 전각도 단청을 다시 칠하고 기와를 교체하는 보수 작업이 이뤄졌다. 창덕궁은 1970년대 초반 대대적인 보수를 거쳤고, 후원도 정비돼 1976년부터 제한적으로 공개됐다.
◇석굴암·불국사 보수와 수원 화성 복원
석굴암은 일제강점기 보수 과정에서 잘못된 공법으로 습기가 차고 이끼가 끼는 등 훼손이 심각했다. 1961년 문화재관리국이 석굴암 보수 계획을 수립하고 유네스코에 기술 지원을 요청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보수 공사가 진행됐다. 유네스코는 기술 자문과 함께 일부 재정도 지원했다. 이는 대한민국 문화재 보존에 국제기구가 협력한 첫 사례였다.
불국사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대대적인 보수가 이뤄졌다. 대웅전, 극락전, 무설전 등 주요 전각을 해체·보수하고, 청운교·백운교, 연화교·칠보교 등 석조 계단을 정비했다. 다보탑과 석가탑도 균열 보수와 세척 작업을 거쳤다.
수원 화성 복원은 광화문 복원과 달리 고증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6·25 전쟁 때 크게 파괴된 수원 화성을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복원했다. 다행히 정조 때 화성 건립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화성성역의궤’가 남아있어 복원 작업에 큰 도움이 됐다. 의궤에 기록된 설계도와 공사 기록을 토대로 성곽, 성문, 포루, 각루 등을 복원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천마총 발굴, 신라 황금 문화를 세계에 알리다
1973년 4월 경주 대릉원 155호분(천마총) 발굴은 한국 고고학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금관, 금제관식, 천마도 장니, 각종 금제 장신구 등 1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를 그린 말다래가 발굴되면서 고분 이름이 천마총으로 정해졌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회화 작품이었다.
천마총 발굴은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발굴 과정이 신문과 방송에 연일 보도됐고, 유물 공개 전시회에는 수십만 명이 몰렸다. 신라의 화려한 황금 문화가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1974년에는 황남대총 발굴이 시작됐고, 1975년까지 2년간 발굴 작업이 진행돼 금관 2점을 비롯해 수만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서울시 암사동 선사주거지는 1960년대 후반 홍수로 드러났고, 1970년대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신석기시대 움집터 수십 기가 확인됐고, 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됐다. 1979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1978년 11월 14일 박정희 대통령이 토산품가게를 방문하고 있다.
◇박물관 시대의 개막과 민족문화 중흥
국립중앙박물관은 1972년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건물로 이전하면서 전시 공간이 대폭 확대됐다. 고고관, 미술관, 역사관 등으로 나뉘어 전시를 체계화했고, 천마총 발굴 유물전, 고려청자전 등 기획 전시를 열어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지방 국립박물관 건립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중요한 성과였다. 1975년 경주에 국립경주박물관 신축 건물이 준공됐다. 연면적 1만여 평방미터에 달하는 대규모 시설로, 천마총 금관을 비롯한 신라 유물을 집중 전시했다. 부여국립박물관과 공주국립박물관도 시설을 확충하고 소장품을 늘렸다. 광주국립박물관(1978년) 등도 이 시기 설립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은 1975년 경복궁 내에 개관했다. 한국인의 전통 생활상을 보여주는 의식주 관련 유물, 생업 도구, 관혼상제 용품 등을 전시했다. 1974년에는 경기도 용인에 한국민속촌이 개장해 전국 각지의 전통 가옥을 이전·복원하고 전통 공예와 민속놀이를 선보였다.
1970년대 들어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문화 중흥’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7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의 토대 위에 민족문화를 꽃피우자”라며 문화정책 강화를 천명했다.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정신문화를 강조한 것이었다.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설립됐다. 약 26만 평의 부지에 연구동, 도서관, 박물관, 대학원 등을 갖춘 대규모 연구기관이었다. 한국학 전반에 걸친 연구를 수행하고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68년 설립돼 세종대왕 동상 건립, 한글학회 지원 등을 추진했다. 1970년 세종로에 세종대왕 동상이 제막됐다. 전통문화 교육도 강화돼 국악고등학교를 지원하고 국립국악원을 확충했으며, 각 대학에 국악과가 신설됐다.
◇관광 개발과 문화재 활용, 개발의 그늘
1970년대 정부는 문화재를 관광 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외화 획득과 국가 이미지 제고를 위해 관광산업을 육성하면서 문화재가 핵심 관광 상품으로 부각됐다.
경주 관광종합개발계획은 1970년대 가장 야심 찬 문화재 관광 사업이었다. “경주를 동양의 로마로 만들자”라는 구호 아래 대릉원 일대를 정비하고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가는 도로를 확장했다. 보문단지에 호텔과 관광 시설을 건설했다.
대릉원은 거대한 고분 공원으로 조성됐다. 잔디를 심고 산책로를 만들었으며, 천마총은 내부를 전시관으로 꾸며 일반에 공개했다. 관광객이 직접 고분 내부에 들어가 발굴 현장을 볼 수 있게 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1970년대 중반 연간 100만 명 이상이 찾는 명소가 됐다.
서울에서도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등 고궁이 정비돼 관광 명소로 부각됐다. 고궁 야간 개장, 수문장 교대식 재현 등 관광 프로그램도 개발됐다.
급속한 경제개발과 도시화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됐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서울 도심 재개발이었다. 청계천 복개 공사(1958~1977년)로 주변 한옥과 전통 상가가 대거 철거됐다. 종로와 을지로 일대 한옥 밀집 지역이 사라지고 빌딩으로 대체됐다.
서울 성곽도 도시 개발 과정에서 추가로 훼손됐다. 도로 건설과 아파트 건설로 성곽이 끊어지거나 철거됐다. 지방에서도 전주, 대구 등 전통 한옥마을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
고속도로와 댐 건설 과정에서도 문화재가 파괴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1968~1970년) 때 일부 유적이 파괴됐고, 충분한 조사 없이 공사가 강행된 구간도 많았다. 소양강댐(1973년), 안동댐(1976년) 건설로 수몰 지역의 문화재가 긴급 이전됐지만, 모든 문화재를 구하지는 못했다.
문화재 도굴과 밀매도 계속됐다. 1960~70년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문화재를 팔아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분 도굴, 사찰 문화재 절도 사건이 빈발했다. 일부 문화재는 일본과 미국 등으로 밀반출됐다.
문화재 보존 예산은 전체 국가 예산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1970년대 문화재 관련 예산은 연간 수십억 원 수준으로, 국방비나 경제개발 예산에 비하면 미미했다. 긴급한 보수가 필요한 문화재도 예산 부족으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력도 부족했다. 문화재관리국과 지방사무소 직원은 1970년대 후반에도 수백 명에 불과했다. 전국에 산재한 수만 건의 문화재를 관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었다. 전문성을 갖춘 보존과학자, 복원 기술자도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발 사업과 문화재 보존이 충돌하면 대부분 개발이 우선됐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옛것을 지키는 게 무슨 의미냐”는 인식이 팽배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의식도 조금씩 변화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여론이 커졌다.
◇평가와 유산, 토대는 닦았으나 과제도 남겨
박정희 대통령 집권 18년간의 문화재 정책은 명암이 교차한다. 긍정적 평가는 체계적인 법·제도를 확립하고 수천 건의 문화재를 지정·보호했다는 점이다. 특히 무형문화재 제도는 세계적 모범 사례로, 200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의 모델이 됐다.
문화재 전문 조직과 박물관 시스템을 갖춘 것도 큰 성과였다. 천마총 발굴 같은 학술 성과로 대한민국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국민의 문화재 인식도 크게 높아졌다.
부정적 평가는 급속한 개발로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됐다는 점이다. 광화문 복원 같은 고증 부족 사례, 예산과 인력 부족 등도 한계로 지적된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박정희 시대는 한국 문화재 보호의 근대적 틀을 만든 시기”라고 평가한다. 이 시기 만들어진 법과 제도, 조직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무형문화재 제도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정책도 있다. 하지만 개발과 보존의 균형을 맞추지 못해 많은 문화재를 잃었고, 일부 복원 사업의 졸속 추진은 후대에 부담을 남겼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 문화재 정책은 경제개발과 문화재 보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개발에 더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이후 세대가 문화재를 더 잘 보존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문화재 정책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한계를 보완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개발 사업 전 문화재 영향 평가 의무화, 고증에 충실한 복원, 예산 확대 등이 추진됐다. 광화문은 2010년 원위치에 목조로 재복원되었고, 경복궁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후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문화재보호 시스템의 뿌리는 이 시기에 뿌려졌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폐허에서 출발해 최소한의 제도를 만들고 수천 건의 문화재를 지정·보호한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