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SNS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다
2400년 전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에게 던졌던 질문은 오늘날 인공지능을 인용하는 대통령에게도 유효하다
당신은 진정한 통합과 소통을 위해 말하는가, 아니면 당파적 이익을 관철하려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말하는가?
대통령의 말이 논란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공소청장과 중수청장의 국무회의 배석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인공지능 답변을 공개하며 반박했다. “제미나이에게 물어봤습니다. 정부조직법 제11조 부정하는 공소청장, 중수청장의 국무회의 배석 불가론은 위헌적 억지입니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배석 불가론이 대통령의 행정감독을 부정하는 “궤변”이라고 딱 잘라 판단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대통령이 인공지능 제미나이의 답변을 근거로 반대 의견을 ‘궤변’이라고 규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 중수청장의 국무회의 배석이 논란이 되는 이유와 “과연 바람직한가?”라고 묻자 전혀 다른 답변이 나왔다. 수사기관을 행정부의 민주적 통제 아래 두는 것과 수사기관장의 국무회의 참석을 허용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며, 수사의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두 영역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제미나이의 말이 옳은가?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어느 답변이 옳으냐가 아니다. 질문에 따라 서로 다른 답변을 내놓는 인공지능의 말을 근거로 대통령이 반대 의견을 ‘궤변’이라고 단정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묘한 역설이 숨어 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유창하게 말하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충분히 구별하지 못하는 인공지능이야말로 현대의 소피스트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피스트는 본래 지혜와 지식을 갖춘 자를 의미했다. 그들은 자유 시민에게 소통을 위한 변론술을 가르쳤지만, 나중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 변론술을 악용했기 때문에 ‘궤변가’라는 악명을 얻게 됐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피스트는 말의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고르기아스>에 등장하는 소피스트 고르기아스는 수사학을 인간에게 자유를 제공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게 하는 힘으로 규정한다. 그에게 말은 단순히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움직여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권력의 기술이다. 이에 반해 소크라테스는 설득과 앎을 구별한다. 사람들에게 특정한 믿음을 갖도록 만드는 것과 그들이 진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상대방을 논박하는 것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논박당하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자신의 오류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적 대화와 소피스트적 수사학의 결정적인 차이다. 전자가 진리를 향한 공동의 탐구라면, 후자는 설득을 통한 영향력의 획득이다. 이 구별은 오늘날 인공지능 시대에 SNS로 유통되는 언어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대통령 말엔 국가권력의 힘이 실려
그런데 대통령은 바로 이 인공지능의 답변을 자신의 정치적 주장에 대한 권위 있는 근거로 제시했다. 더구나 그것을 통해 반대 의견을 ‘궤변’이라고 규정했다. 궤변의 가능성을 충분히 검증하지 않은 채 인공지능의 말을 빌려 타인의 주장을 궤변이라고 단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사건의 가장 흥미로운 역설이다. 논란이 계속되자 청와대 홍보소통수석은 대통령의 제미나이 인용은 단순히 법조문 팩트를 물어본 것일 뿐 인공지능 답변을 국정 운영의 근거로 내세운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물론 대통령이 제시한 법적 논거가 반드시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중수청장의 국무회의 배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 중 누구도 그것이 위법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행정부를 통솔하며, 수사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법률상 국무회의 배석이 ‘가능한가’라는 질문과 수사기관의 정치적 독립성을 위해 배석을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법적 권한의 문제이고, 후자는 제도적 설계와 권력 행사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다.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바람직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는 권력자가 법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도록 권장하는 체제가 아니다. 오히려 권력자가 자신의 권한을 절제하도록 요구하는 체제다. 이러한 제도적 논쟁을 ‘위헌적 억지’나 ‘궤변’으로 단정하는 순간, 합리적 토론 공간은 좁아진다. 문제는 대통령의 말이 일반 정치인의 말과 다르다는 데 있다. 야당 정치인은 자신의 지지자를 결집하려고 날카로운 정치적 수사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국민까지 대표한다. 대통령 말에는 국가권력의 무게가 실려 있다. 같은 표현이라도 일반 정치인이 사용하면 정치적 주장에 그칠 수 있지만, 대통령이 사용하면 정부의 공식적인 판단·정책 방향으로 받아들여진다.
국민과 직접 소통 발상이 더 문제
따라서 대통령의 말은 단순한 의견 표명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현실을 규정하고, 무엇이 정당한 주장이고 무엇이 비난받아야 할 주장인지를 결정하는 힘을 갖는다. 최근 대통령의 SNS 정치를 둘러싼 논란도 이런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동산 문제를 투기 세력과 서민의 대립으로 단순화하면 주택 공급, 수도권 집중, 청년들의 주거 접근성과 같은 구조적 문제가 뒤로 밀려난다. 우크라이나에 억류된 북한군 포로의 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반대 의견을 극단적인 표현으로 비난하면 국제인도법, 당사자의 자유의사, 외교적 협상이라는 복잡한 쟁점은 도덕적 대립에 가려진다. 이러한 문제들은 본래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정치적 과제다. 그러나 대통령의 언어가 이를 옳고 그름, 정상과 비정상, 개혁과 반개혁의 대립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정책에 대한 이견은 쉽게 도덕적 결함으로 해석된다. 반대자는 설득해야 할 시민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된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대통령이 국회와 정당, 관료조직, 언론과 같은 중간 제도를 거치지 않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여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발상에 있다. 이러한 정치 방식은 포퓰리즘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지도자는 기존 정치제도를 국민의 의사를 왜곡하는 장애물로 간주하고 자신이야말로 국민의 진정한 의지를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파시즘 역시 의회와 정당의 매개를 불신하고 지도자와 대중의 직접적인 결합을 강조했다. 물론 SNS를 사용하는 대통령을 곧바로 파시스트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국민과의 직접 소통은 관료적 폐쇄성을 극복하고 정치의 투명성을 높이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도자가 자신의 판단을 국민의 의지와 동일시하고 반대자를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으로 규정하기 시작한다면, 그 안에는 분명 반다원주의적 정치의 위험이 존재한다.
대의민주주의는 단순히 국민 의사를 지도자에게 전달하는 체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가진 시민들이 제도적 절차를 통해 의견을 조정하는 체제다. 국회가 토론하고, 행정부가 검토하며, 사법부가 법률에 따라 판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때로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그 비효율은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가 지불하는 비용이다. 반면 SNS는 정반대의 원리로 작동한다. 빠른 반응, 선명한 대립, 강렬한 감정이 보상받는다. 복잡한 설명보다 짧은 단정이, 신중한 판단보다 분노와 조롱이 쉽게 확산된다. 대통령이 이러한 공간에서 직접 정치적 논쟁을 주도하면 제도적 숙의의 시간은 대중적 반응의 속도에 압도될 위험이 있다. 인공지능은 이러한 위험을 더욱 증폭시킨다. AI는 정치인의 주장을 순식간에 정교하게 만들고 그럴듯한 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SNS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다. 인공지능 시대에 최고 권력자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을 생산하는 능력이 아니다. 자신의 말이 갖는 힘을 인식하고 그것을 절제하는 정치적 지혜다. 민주주의의 성숙함은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가로 측정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얼마나 존중하는가, 자신의 판단을 얼마나 기꺼이 검증에 맡기는가, 그리고 때로는 말을 멈추고 제도가 작동하도록 기다릴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2400년 전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에게 던졌던 질문은 오늘날 인공지능을 인용하는 대통령에게도 유효하다. 당신은 진정한 통합과 소통을 위해 말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당파적 이익을 관철하려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말하는가? 문제는 ‘말’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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