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현금 13억원’ 공 팀장이 회사를 안 떠나는 이유

로또가 대한민국에 처음 상륙했던 2000년대 초반을 기억한다. “인생역전”이란 카피 아래 금목걸이를 두른 남성이 기름진 미소를 흘리고, 양옆엔 ‘쭉쭉빵빵’ 미녀들이 늘어서 있었다. 당대 대중이 투사했던 로또 1등의 판타지는 원초적 환락이었다.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포스터. 공은태는 로또 1등 당첨금을 수령하고도, 통장에 13억원을 넣은 채 평소와 다름없이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한다. 티빙 제공

광고

로또가 대한민국에 처음 상륙했던 2000년대 초반을 기억한다. “인생역전”이란 카피 아래 금목걸이를 두른 남성이 기름진 미소를 흘리고, 양옆엔 ‘쭉쭉빵빵’ 미녀들이 늘어서 있었다. 당대 대중이 투사했던 로또 1등의 판타지는 원초적 환락이었다. 최근 종영한 화제작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tvN)의 공은태(이준혁) 역시 당첨 사실을 확인한 순간 잠시 환락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러다 이내 “이건 내가 아니다”라며 꿈에서 깬다. 그는 당첨금을 수령한 후 곧바로 직장에 복귀한다.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 드라마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주목해야 할 노동철학과 재무적 리얼리즘을 교차시킨다.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1회. 공은태가 로또 1등 당첨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수동적으로 살아가다, 편의점 직원에게 얼떨결에 강매 당한 로또가 당첨되자 그의 삶이 능동적으로 바뀐다. 티빙 제공

로또로 비튼 웰메이드 오피스물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는 동명의 웹툰 원작을 각색한 10부작 드라마로, 시청률과 화제성을 모두 잡았다. 기존 오피스물을 영리하게 비튼 ‘웰메이드 오피스물’로 손색이 없다. 그간 한국 오피스물은 엄혹한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미생’들의 처절한 생존기이거나, 천재적인 주인공의 영웅적 복수극으로 양분되었다. 사이다 서사를 위해 주인공에게 천재성을 부여하려니, 회귀물이나 빙의물 같은 판타지가 남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주인공에게 ‘13억원’을 쥐여주고서, 역량이 증진되는 현실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공은태는 부하직원에게 치받히고, 윗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막내 팀장이었다. 샌드위치 신세의 공은태의 통장에 13억원이 꽂히니, 그의 행보가 달라진다.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이 생긴 게 아니다. 그저 부당함에 “아니오”라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율적인 결단력이 생겼을 뿐이다. 그는 스스로 최선이라 생각하면 기획 예산의 30%를 초과하는 베팅을 막 지르기도 한다(“잘리기밖에 더하겠어?”). 그런데 이런 ‘선 넘는’ 행동들이, 오히려 조직을 더 잘 굴러가게 한다.

광고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2회. 당첨금을 수령한 공은태는 회사로 복귀해, 자신을 치받던 부하직원 양 대리에게 제대로 화를 내 기강을 잡는다. 티빙 제공

그동안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리더십과 소통 역량 등을 훈계해왔다. 그러나 공은태의 궤적은 직장인들이 그간 주도적이지 못했던 이유가 개인의 능력 부족 탓이 아님을 드러낸다. 그가 보여주는 자율성과 능동적 퍼포먼스는, 개인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진짜 이유가 ‘목구멍이 포도청’인 구조적 억압 때문이었음을 증명한다. 즉 ‘잘려도 괜찮다’는 안정감이 확보되자, 억눌려 있던 본연의 역량과 리더십이 자연스레 분출된 것이다. 드라마는 말미에 13억원을 사용하지 않고도, 13억원이 준 안정감만으로 엄청난 변화가 초래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13억원이 없어도 정신 승리만으로 그리될 수도 있을까. 그건 관념론적 망상이다.

그보다는 자산의 형태이든, 복지안전망이든, 재취업의 기회로든, ‘잘려도 괜찮다’는 안정감을 확보하여, 개인의 역량과 행복감이 현저하게 증가하는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노동은 자아실현

드라마에서 가장 신선했던 장면은 다른 당첨자가 “이제 화를 내보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공은태는 흠칫 놀라지만, 회사로 돌아와 처음으로 화를 내본다. 이 문제의식은 노동의 본질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사실 인간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다. 진짜 고통스러운 것은 노동이 생계와 직결되어 있기에 느꼈던 부정적 감정들이다. 부당한 지시에도 눈감고, 인격을 깎아내리는 조직 논리 앞에서도 굽실거리며, 감정을 억압해왔다. 존엄하지 않은 굴종이 내면을 병들게 한 진짜 원인이다.

광고

광고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2회. 당첨금을 수령하러 은행에 간 공은태가 다른 당첨자와 대화하는 장면. “이제 화를 내며 살겠다”는 말을 듣고, 공은태가 놀란다. 티빙 제공

중국 법인의 내부고발자 이야기는 이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나이가 드니, 하는 게 일밖에 없어요. 일이 후져지면, 저도 후져지는 거잖아요.” 장 대리는 ‘나의 일이 후져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왕따’가 되기를 감수하고, 내부고발에 나선다. 인간에게 노동은 단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다. 자아정체성을 구성하는 행위다. 자아실현이라는 게 꼭 예술가에게만 해당하는 단어가 아니다. 기안서를 투명하게 작성하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떳떳하게 동료들과 협업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 속에도 숭고한 자아실현이 있다. 공은태와 정 팀장이 경쟁사 직원으로 만나 나누는 마지막 대화에도 일의 재미와 동료들과 나누는 희로애락이 담뿍 담겨있다. 자유롭고 평등한 노동은 그 자체로 신나게 참여하고픈 놀이가 될 수 있음을 이 드라마는 역설한다.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6회. 중국 지사의 장 대리가 동료들의 조직적인 횡령을 내부 고발하겠다고 말하는 장면. ‘왕따’를 겪게 될 것이라 경고해도 굽히지 않는다. 티빙 제공

인공지능과 보편적 고소득 시대

노동에 대한 성찰은 근미래에 대한 사회학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실무를 대체한 사회에서 도입될 기본소득이나 획기적인 생산력 증대에 따른 보편적 고소득 담론이 진지하게 논의 중이다. 일각에서는 노동 의욕 상실을 우려하지만, 드라마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공은태는 정 팀장의 더 높은 연봉의 스카우트 제의나 여배우의 매니저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 이제 공은태에게 직업 선택의 기준은 돈이 아니다. (“돈은 저도 있습니다.”) 생존의 압박에서 벗어난 인간은 (나태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찾고, 훼손되지 않은 자존감을 바탕으로 더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노동에 뛰어든다. 돈이라는 족쇄가 풀린 뒤에야 비로소 순수하게 일의 재미를 발견하고 동료와의 협업을 구축해나가는 공은태나 로또 당첨 후에도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리는 카페 사장님을 보노라면, 노동의 탈소외가 이루어진 미래 사회의 시뮬레이션을 보는 듯하다. 보편적 고소득이 주어지는 시대가 온다면 인간은 일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인간다운 노동을 새롭게 정의하며, 기꺼이 출근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광고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3회. 공은태의 상사인 박 부장은 굉장한 카리스마와 통찰력으로 인사와 업무 전체를 꿰뚫는 혜안을 보여주지만, 그도 워킹맘의 애환을 지닌 생활인이다. 티빙 제공

인플레이션 방어와 신용

드라마가 노동철학과 미래전망의 맹아를 품은 것과 별개로, 재정적 리얼리즘을 일깨운다. 공은태가 계속 출근하는 이유는 자아실현이라는 낭만적 명분도 있지만, 재무적 타산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로또 1등 당첨금 19억원. 세금을 제하고 13억원 남짓이다. 분명 큰돈이지만, 실물 자산의 가치가 폭등하고 화폐 가치가 하락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인생역전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13억원을 통장에 묵혀두고 있는 공은태를 보자니, 부장님 피셜 “조마조마하다.” 화폐 가치 하락으로 매일 조금씩 녹아내리는 13억원을 지키려면, 필사적으로 실물 자산으로 갈아타는 ‘인플레이션 헤지’를 감행해야 한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면 돈이 부족하지 않은지 생각해 보라”는 말이 있다. 한동안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파이어족’ 담론은 노동소득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자본소득을 통한 조기 은퇴를 부추겼다. 하지만 13억원으로 파이어족이 되기엔 화폐 가치는 너무 떨어졌고, 기대여명은 너무 길어졌다. 극 중 “연봉 7천만원의 현금흐름이 30억 자산과 맞먹는다”라는 부동산 중개사님 말씀은 짧지만, 강렬하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 ‘신용’이다. 13억원으로 서울에 번듯한 아파트를 사려면 반드시 대출을 껴야 한다. 은행에서 대출을 일으키려면 월급이 찍히는 ‘직장인’이라는 신용보증서가 필수적이다. 13억원이라는 종잣돈에 직장인의 대출 ‘풀 레버리지’를 장착해야만, 비로소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이라는 ‘성공한 중산층 밈’이 완성된다.

결국 공은태 정도의 자산 보유자에게 직장이란 생계를 위해 억지로 다니는 수용소가 아니라, 13억원에 대출을 지렛대 삼아 ‘부동산 자산 갈아타기 게임장’의 입장권을 얻는 최적의 베이스캠프인 셈이다. 이래저래 현금흐름의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고 든든하게 신용을 ‘땡기려면’ 어떻게든 직장을 다녀야만 한다는 자본주의적 현실 인식이 드라마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광고

부당함에 “화낼 수 있는” 안정성만 있다면, 노동은 자아실현의 무대가 된다. 13억원으로는 인생역전을 할 수 없지만, 직장이 있다면 신용을 ‘땡겨’ 인플레이션 방어를 할 수 있다. 공은태가 출근하는 두 이유이자, 드라마가 말해주는 노동과 재정에 관한 엄중한 두 명제이다. 자본의 한계와 자산의 한계 속에서, 존엄을 지키고 자아를 실현하며, 인플레를 방어하기 위해 오늘도 외줄타기 하는 너와 나를 위해. 한잔해~

황진미

|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