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의 반도체 장비 계열사 한화세미텍의 HBM 장비 수주 기대감 뒤에 숨겨진 재무 리스크를 집중 점검한다.
김동선 한화 부사장/사진 제공=한화호텔앤드리조트
한화그룹이 오는 7월 공식 선보일 '한화머시너리앤서비스(가칭)'는 김동선 부사장의 독자 노선을 상징하는 결정체다. 장남 김동관 부회장이 방산과 에너지를, 차남 김동원 사장이 금융을 맡는 구도에서 삼남 김 부사장은 유통과 로봇을 넘어 한화세미텍을 품으며 반도체 장비라는 '제조업 핵심'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야심 찬 출발과 달리 제조업 핵심 한화세미텍은 현재 재무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하다. 결국 이 매듭을 풀고 자생력을 확보하는 것은 김 부사장의 몫으로 남는다. 그의 실질적인 독립 경영 능력과 유통 산업을 넘어 제조업에서의 경영 능력을 검증받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분리된 몸, 귀속된 빚…계열 분리 후에도 남는 '형제 종속'
/그래픽=박진화 기자
2년 전 한화그룹의 지배구조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서 비방산 부문을 떼어내 '한화인더스트리얼솔루션즈'라는 신설 지주사를 세우는 방향으로 재편됐다. 한화세미텍은 이 신설 지주의 100% 자회사인 한화비전 산하로 편입되며 김동선 부사장의 영향력 아래 확실히 들어왔다. 이론적으로는 김동관 부회장의 '에어로스페이스'와는 완전히 남남이 된 셈이다.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화세미텍의 장부를 짓누르는 459억원 '기타금융부채평가손실'은 여전히 김동관 부회장이 이끄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가에 연동돼 있다. 한화세미텍이 임원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RSU(양도제한조건부주식) 기초자산이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식으로 설정된 것을 장부 상 부채로 처리한 결과다.
K-방산의 호재로 에어로스페이스의 주가가 오를수록 동생 회사인 한화세미텍은 임원 보상용 부채가 불어나며 자본을 깎아먹는 상황에 직면한다. 최근 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자 한화세미텍 장부상 부채액이 500억원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커진 이유다.
몸은 김동선 부사장의 신설 지주로 옮겨왔지만 갚아야 할 빚의 크기는 여전히 '형의 회사' 성적표에 따라 춤을 출 수 있다는 의미다.독립 경영을 선언했음에도 재무적으로는 여전히 형제 계열사의 성장에 따른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희생양 구조를 탈피하지 못하는 셈이다. 이런 종속 관계를 끊어내지 못한 채 감행하는 계열 분리는 김 부사장에게 시작부터 부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700억 외상 위에 쌓은 'HBM 청사진'
김동선 부사장이 제조업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입증하기 위해 선택한 카드는 'HBM(고대역폭메모리)'이다. 한화정밀기계 시절부터 공들여온 TC 본더 기술을 앞세워 SK하이닉스 공급망에 진입한 것은 분명한 성과다. 하지만 화려한 수주 실적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협력사에 지급해야 할 700억원 규모의 매입채무가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협력사에 지급해야 할 700억 원 규모의 매입채무는 김 부사장의 독립 경영 안착을 가로막는 가장 현실적인 위협이다. 제조업에서 공급망(Supply Chain)의 안정성은 경영자의 기초 역량으로 통한다. 돈이 없어 외상값을 미루는 상황이 지속될 경우 핵심 부품사들의 이탈이나 납기 지연으로 이어져 생산 라인 자체가 멈춰설 수 있기 때문이다. '제조 경영인'으로서 첫 발을 뗀 김 부사장에게 공급망 붕괴는 곧 경영 실패라는 낙인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SK하이닉스라는 대형 고객사를 확보했음에도 현금 흐름 개선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HBM4 등 차세대 공정 대응을 위한 막대한 R&D 비용과 생산 인프라 확충에 들어가는 현금 소모량이 수주로 인한 유입 속도를 앞지르고 있다. 장비 산업 특성상 수주부터 대금 회수까지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누적된 매입채무는 향후 한화세미텍의 유동성 관리에 상당한 부담을 줄 가능성이 있다. 단순히 수주 잔고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실질적인 자본 확충과 재무 구조 개선이 김 부사장의 눈앞에 놓인 가장 시급한 과제다.
한화세미텍 2세대 하이브리드본더 'SHB2 Nano' /사진제공=한화세미텍
'치적쌓기' 소송전 오명에 패소 리스크까지… 쉽지 않은 홀로서기
이처럼 기초적인 대금 지급 능력조차 의심받는 상황에서 정작 회사가 전력을 쏟는 지점은 재무 건전성 회복이 아닌 '대외적 공세'라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특히 한미반도체와의 특허 소송전은 한화세미텍의 미래를 건 위험한 도박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분쟁의 발단은 지난해 한미반도체가 한화세미텍(당시 한화정밀기계)을 상대로 제기한 '본딩 장비 특허 침해 금지' 소송이다. 한미 측은 자사가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듀얼 TC 본더의 핵심 기술을 한화가 무단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한화세미텍은 특허 무효 심판으로 맞서며 현재 양측은 다수의 민·형사 소송이 얽힌 진흙탕 싸움에 돌입했다. 소송가액 자체는 건당 수십억 원 수준이지만 실제 리스크는 패소 시 내려질 '장비 판매 금지 가처분'가 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만약 법원이 한미 측의 손을 들어줄 경우 한화세미텍은 해당 장비의 생산을 중단해야 한다. 이미 확보한 수주 잔고마저 이행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다. 최악의 경우 고객사로부터 막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당할 수도 있다. 재무 건전성 회복보다 'HBM 시장 장악'이라는 대외적 메시지에 집착해 무리한 소송전을 이어가는 행보가 김 부사장의 경영 능력을 입증하기 위한 '위험한 포장'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결국 한화세미텍이 김동선 부사장의 홀로서기를 뒷받침할 진정한 병기가 되려면 그룹 승계 시나리오의 소모품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그룹 공통의 보상 정책(RSU)을 따르기 위해 유동성이 제약되고 형제 계열사 주가에 연동된 수익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김 부사장의 독립 경영 기조는 시작부터 구조적 한계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재계 관계자는 "김동선 부사장이 유통에서 보여준 화제성을 제조 부문에서도 이어가려 하겠지만 숫자로 증명되지 않는 제조업 경영은 시장의 냉혹한 평가를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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