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한국 인터넷 탄생···기술 봉쇄 뚫은 ETRI 집념 "말도 안 되는 도전"·...

2.5Gbps 광전송 시스템 상용 시험망 개통식 현장. 1982년 1200bps의 느린 신호로 시작된 한국의 인터넷이 기가비트급 대용량 정보 고속도로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 기술은 훗날 초고속 인터넷...

한국 인터넷 탄생···기술 봉쇄 뚫은 ETRI 집념 "말도 안 되는 도전"·...

[ETRI 50주년 특집 기획②] 한국 인터넷의 탄생

1200bps 모뎀으로 국내 첫 인터넷 연결

열악한 환경 속 통신 구현···연구진 자력 개발

K-LAN·광통신 개발 병행···정보통신 인프라 기반 구축

2.5Gbps 광전송 시스템 상용 시험망 개통식 현장. 1982년 1200bps의 느린 신호로 시작된 한국의 인터넷이 기가비트급 대용량 정보 고속도로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 기술은 훗날 초고속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사진=ETRI]

1982년 5월 어느 날, 경북 구미의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와 서울대학교 중앙컴퓨터가 1200bps짜리 모뎀 하나로 연결됐다.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열악한 서울대 연구실에서, 정부의 무관심과 미국의 기술 비개방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연구진은 '말도 안 되는 도전'을 감행했다. 그 결과 한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의 인터넷 연결 국가가 됐다.

대한민국의 정보통신 역사는 1960년대 초반,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1년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고작 82달러였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며 모든 인프라가 파괴된 땅에서 과학기술은 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한 도구였다. 정부는 과학기술을 국가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삼고 산업화에 착수했다. 1962년 과학기술 정책을 전담하는 최초의 행정기구인 기술관리국을 설치했고, 통신사업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화를 신청해도 설치까지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통신 사정이 열악했다. 1961년 12만 대에 불과하던 전화기는 1976년 139만 대로 늘었지만, 급증하는 수요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화 한 대 값이 서울 집 한 채 값과 맞먹던 시절, 우리 손으로 직접 통신 기술을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생겨났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KERTI),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가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들은 훗날 하나로 통합되어 지금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됐다.

당시 연구원들은 해외 제품을 들여와 구조를 분석하고 작동 원리를 익히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으로 사투를 벌였다. 기초과학도 원천기술도 없던 시절, 그들이 믿을 것은 자신의 두뇌와 밤샘을 견디는 체력뿐이었다. 정부는 1975년 정보산업 육성 전담기구로 정보산업국을 설치했고, 19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선포하며 반도체와 컴퓨터 기술 개발에 강도 높은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국가적 흐름 속에서 인터넷의 씨앗이 뿌려졌다.

◇ 1200bps 속도에 담긴 사연과 인터넷의 태동

1982년 시도된 인터넷 연결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전길남 박사는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당시 연구소 내에서도 인터넷은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다.

그는 "컴퓨터 국산화 팀에는 40명이 붙었는데, 인터넷 프로젝트는 나 한 명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무원 한 명이 전부였다. 연구소에서도 반가워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그럼에도 그가 연구를 강행한 이유는 분명했다. 컴퓨터 국산화에 성공하면 세계에서 열 몇 번째가 되지만, 인터넷에 성공하면 세계에서 두 번째가 되기 때문이다. 전 박사는 "힘들어도 15 번째보다는 두 번째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부의 예산 지원도, 정책적 관심도 없었지만 그는 대학원생들을 독려하며 백지 위에서 설계를 시작했다. 미국 대학에서 학생들이 인터넷으로 자유롭게 논문을 내려받는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도 이런 환경이 꼭 필요하다"고 확신했기 때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연구원들은 비싼 컴퓨터 장비에 물이 튈까 봐 비닐을 씌우고 양동이로 물을 받아내며 밤을 새웠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1982년 5월, 구미와 서울 사이의 전송제어 프로토콜(TCP·IP) 접속이 성공했다.

이 연결로 우리나라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인터넷 연결 국가가 됐다. 이 망의 이름은 시스템 개발 네트워크를 뜻하는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으로 지어졌다. 당시 이 망의 수준은 미국의 기술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 박사는 훗날 "만약 그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네트워크 발전은 최소 10년 이상 늦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대만이나 홍콩, 싱가포르가 1990년대 초반에야 인터넷 연구에 착수한 사실은 당시 우리 연구진의 선택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 보여준다.

◇ 멈추지 않고 뻗어 나간 네트워크

성공적인 첫 연결 이후 SDN은 빠르게 성장했다. 1983년 1월에는 KAIST가 이 네트워크에 합류하며 안정성을 높였다. 같은 해 3월에는 네덜란드의 MCVAX와 연결하며 유럽까지 통신망을 넓혔고, 10월에는 미국 HP 연구소와의 국제 연결도 성사시켰다. 1984년에는 아시아권 국가들을 잇는 아시아넷(Asianet)이 공식 출범했다. 기술을 배우기 급급했던 나라가 불과 몇 년 만에 아시아 네트워크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987년에는 국내 20여 개 기관이 SDN에 참여하며 대한민국 정보통신의 든든한 뼈대가 되었다.

이 무렵 연구진은 또 다른 중요한 과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국형 근거리통신망인 K-LAN 개발이었다. 지금은 사무실마다 와이파이나 랜선이 깔려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유선 LAN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연구진은 국제 이더넷 규격이 확정되기도 전부터 독자적인 LAN 기술 개발을 추진했다.

ETRI는 삼성반도체통신, 금성전선, 현대전자, 대우통신 등 당시 4대 전자통신 기업을 설득해 연구원들을 파견받았다. 1984년부터 2년간 이어진 공동 연구 끝에 컴퓨터 간의 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인 NIU와 운영 소프트웨어 일체를 개발해냈다. 실제 연구소 내에 KETRI-NET이라는 실험망을 구축하여 컴퓨터 자원을 공유하고 팩스나 화상 정보 서비스를 수용하는 시험도 진행했다. 비록 나중에 산업계가 외국 제품 도입으로 방향을 틀면서 상용화에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우리 기술로 통신망의 기초를 닦았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가치를 지닌다.

◇ 정보 고속도로의 혈관을 뚫은 광통신 기술

1979년 2월, ETRI 연구진이 대통령 연두순시 중 실시한 국내 최초의 광전송 시험 장면. 전화 신호 96개를 광섬유 두 가닥에 실어 보내는 6.3Mbps급 전송에 성공하며, 대한민국 광통신 시대의 서막을 알린 역사적 순간이다. [사진=ETRI]

인터넷과 LAN이 데이터가 다니는 길이라면, 그 데이터를 더 빠르고 많이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바로 광통신 기술이다. 광통신은 전기가 아닌 빛을 이용해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로, 기존 구리선보다 수만 배 많은 정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 연구진은 1970년대 후반부터 통신망의 디지털화와 정보 대량화 추세에 맞춰 광통신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다.

1978년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한 연구진은 1979년 2월, 당시 대통령의 연구소 방문 현장에서 96개의 전화 신호를 광섬유 단 두 가닥으로 보내는 6.3Mbps 광전송 시험을 시연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광전송 시험으로 기록되었다. 이어 연구진은 45Mbps 광섬유 통신시스템을 개발하여 서울 광화문전화국과 중앙전화국 사이에 깔고 국내 최초의 현장 시험에도 성공했다.

1980년대 들어 전 세계적으로 광통신의 기준이 장파장(1.3μm)으로 바뀌는 흐름이 나타났다. 우리 연구진도 이에 발맞춰 기술 수준을 계속해서 높였다. 1984년부터는 전송 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린 45Mbps, 90Mbps를 거쳐 565Mbps 비동기식 장파장 광전송 시스템을 차례로 개발했다.

이 기술들은 전국 장거리 주요 통신 구간에 실제로 설치되어 대한민국이 1가구 1전화 시대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송 효율이 좋아지자 시외통화료가 파격적으로 낮아졌고, 국민들은 이전보다 훨씬 저렴하고 편리하게 통화할 수 있게 되었다. 빗물 새는 연구실에서 싹을 틔운 기술이 국민의 삶을 직접적으로 바꾼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광통신 시스템의 국산화율을 높이는 중요한 기술적 토대가 됐다.

◇ 정보 고속도로의 혈관을 뚫은 광통신 기술

인터넷망 구축과 병행하여 ETRI는 광통신 기술 개발에도 나섰다. 광통신은 전기적 신호 대신 광신호를 매개로 정보를 처리·전송하는 기술로, 구리선보다 월등히 양호한 상태로 수만 배 이상의 정보 내용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어 통신망 확대에 결정적인 열쇠였다.

1978년 개발에 착수한 ETRI는 1979년 2월, 대통령 연두순시에서 96개의 전화 신호를 광섬유 2가닥으로 보내는 6.3Mbps 광전송 장치 시험을 성공리에 마쳤다. 이어 45Mbps 시스템을 개발해 광화문전화국과 중앙전화국 간 국내 최초 현장 시험에도 성공했다.

ETRI는 1978년부터 광통신 기술개발에 착수하여, PCM(Pulse Code Modulation) 부호화된 전화 신호 96개를 광섬유 2가닥으로 보내는 6.3Mbps 광전송 장치를 개발했다. 1979년 2월 대통령 연두순시에서 시험한 이것은 국내 최초의 광전송 시험이었다. 이어서 45Mbps 광섬유 통신시스템을 개발하여 광화문전화국과 중앙전화국 간 국내 최초의 현장시험에도 성공하였다.

1980년대 들어 광통신의 패러다임이 장파장(1.3μm) 중심으로 재편되자, ETRI는 1984년부터 45Mbps, 90Mbps를 넘어 565Mbps에 이르는 비동기식 장파장 광전송 시스템을 잇달아 선보이며 기술 격차를 좁혀나갔다.

이 시스템들은 전국 장거리 주요 구간의 핵심 통신로로 채택되어 대한민국이 '1가구 1전화 시대'로 진입하는 결정적 발판이 됐다. 특히 전송 효율의 극대화는 시외통화료 인하라는 실질적인 국민 혜택으로 이어졌으며, 광통신 설비의 국산화율을 끌어올리는 든든한 기술적 토대가 됐다.

◇ 연구진의 집념이 남긴 유산과 미래

1982년 빗물 새던 연구실에서 1200bps 모뎀 하나로 시작된 도전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초고속 인터넷과 5G 통신의 뿌리가 되었다. 당시 연구원들은 단순히 기술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밤낮을 잊고 연구에 매진했다. 연구소의 불은 24시간 꺼지지 않았고, 그런 치열함 속에서 우리나라는 기술 수입국에서 기술 수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40여 년 전 빗물 떨어지는 연구실에서 TCP/IP를 익히고 광섬유를 연결했던 집념은 이제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과거의 성공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구자의 경고다. 전 박사는 "전화교환기 국산화는 20세기의 숙제였을 뿐, 21세기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며 "과거에 잘했던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은 시한폭탄과 같다. 다음 50년을 준비하기 위해 연구진의 국적에 상관없이 세계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서로를 자극하는 국제화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TRI는 이제 국가지능화 전담기관으로 변신하여 인공지능 기술이 국가와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도록 힘쓰고 있다. 인공지능 반도체부터 보안 기술, 그리고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다양한 응용 서비스까지 연구 영역을 넓히고 있다.

빗물 새던 연구실의 사투는 이제 기록 속의 역사로 남았지만, 그 시절 연구원들이 보여준 도전 정신은 지금도 연구소의 복도를 따라 흐르고 있다. 그 집념은 대한민국이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엔진이다.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