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 모습. 사진=연합뉴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지정학적 리스크로 원유·나프타 수급 불안이 확대되면서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위기감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범용 제품 수익성이 이미 붕괴된 가운데 업계가 탈출구로 삼아온 고부가 스페셜티 전략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국이 고부가 영역까지 빠르게 추격하면서 산업 전반의 구조 재편 압박이 한층 거세지는 모습이다.
"호르무즈發 원가 쇼크" 버틸 체력도 한계
최근 중동의 지정학적 불안으로 인한 호르무즈 해협 통제는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위기감을 다시 고조시키고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석유 소비의 약 20%에 해당하는 하루 2000만배럴 규모의 원유와 석유제품이 통과하는 핵심 해상 수송로다.
국내 정유 및 석유와학 업계는 원유뿐만 아니라 기초원료인 나프타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리스크가 고조될수록 나프타 가격은 급등하고 이는 NCC(나프타분해설비) 수익성의 핵심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의 악화로 나타났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NCC를 중심으로 기초유분을 생산하는 구조다. 한국화학산업협회에 따르면 이 같은 구조는 원유에서 추출한 나프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국제 유가와 수급 상황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외부 리스크는 이미 구조적 압박에 놓인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부담을 키우고 있다.
중국은 지난 10여 년간 대규모 설비 투자를 통해 범용 석유화학 제품 생산능력을 급격히 확대해 왔고 이에 따라 글로벌 시장에서는 공급 과잉에 따른 가격 하락 압력이 지속돼 왔다. 에틸렌 스프레드는 이미 손익분기점인 톤당 250~300달러를 밑도는 상황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중국이 화학 제품 수요 증가분의 상당 부분을 자국 생산으로 흡수하며 기존 수출국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초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태양광 패널용 EVA(에틸렌 초산비닐), 전기차 배터리 분리막용 소재, 반도체용 감광액 등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스페셜티 제품으로 사업 구조를 전환하며 수익성 방어에 나서고 있다. 기술 장벽이 높고 고객 맞춤형 수요가 존재하는 고부가 제품을 통해 범용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여기에 공급망 불안까지 겹쳐지면서 고부가 전환을 위한 투자 재원에 위협이 가해졌다. 롯데케미칼, LG화학 등 주요 기업들은 노후 설비 매각이나 가동률 조정을 통해 현금 흐름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이유다.
LG화학은 여수 NCC(나프타분해시설) 2공장의 가동 중단을 결정했다. 연산 80만톤 규모의 에틸렌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지난 2021년 상업 운전 시작 이후 사실상 최초다. 정기 보수 및 시황 악화라는 설명이나 업계는 나프타 수급 불균형으로 인한 원가 부담이 임계치를 넘어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천NCC 역시 '불가항력'을 선언할 정도로 원료 수급에 차질을 빚고 있으며 올레핀 전환 공정 가동을 중단한 상태다. 사측은 나프타 수급의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NCC 가동률이 60~65%에 그쳐 생산량을 조정하는 단계에서 작은 공정이 필요에 따라 중단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사진=셔터스톡
中, 범용 넘어 스페셜티 추격권 가시화되나
가장 큰 문제는 최근 들어 중국의 추격이 범용을 넘어 일부 고부가 영역까지 확산된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는 석유화학·화학 산업 안정 성장 계획(2025-206)을 통해 고급 폴리올레핀, 전자화학품, 고성능 소재 등을 중점 육성 분야로 명시하며 산업 고도화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 공업정보화부 관련 정책에서도 기초 원료 경쟁 심화와 고급 정밀화학 공급 부족을 동시에 지적하며 구조 전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태양광 봉지재 및 자동차 경량화 소재인 폴리올레핀 엘라스토머(POE)의 경우 2023년 자급률 10% 미만에서 올해는 60% 이상으로 대폭 끓어올릴 전망이다. 당초 한국과 일본 기업들이 독점하던 시장이었으나 최근 중국 기업들이 독자 기술력을 확보하며 상업화 설비 가동 등 생산 확대에 본격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화학 분석기관 ICIS는 "중국 내 POE 생산능력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향후 공급 과잉 우려도 제기된다"고 분석했다.
태양광 패널 소재인 고함량 EVA 역시 2023년 자급률 50% 수준에서 올해는 90%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며, 가전 및 전장 부품에 들어가는 고기능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은 2023년 자급률 40% 수준에서 올해 75%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공격적인 목표를 잡았다.
배터리 소재 분야에서는 중국의 경쟁력이 이미 확인된 상태다. IEA에 따르면 글로벌 양극재 생산에서 중국 비중은 80%를 상회하며, SNE리서치 역시 전해액 시장에서 중국 기업 비중이 90% 이상에 달한다고 집계했다.
전자화학 역시 정책적 지원 대상에 포함돼 있어 향후 추격 속도가 빨라질 가능성이 크다. 초고순도 반도체 소재 등 핵심 분야에서는 한국과 일본 기업들이 기술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경기 안산시의 한 플라스틱 필름 제조 공장에서 중동 사태에 따른 폴리에틸렌 수급 불안으로 인해 소폭의 농업용 필름을 제작하는 압출기의 일부가 가동이 중단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韓, 골든타임 촉박…초고부가가 살길"
전문가들은 한국이 중국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기 전에 고부가를 넘어 '초고부가'로 기술 격차를 벌려야 한다고 제언한다. 단순한 스페셜티 전환만으로는 중국과의 격차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나이스신용평가는 "2026년 공급 과잉 해소가 지연되는 수준을 넘어 한국 석유화학 산업의 구조 재편이 본격화되는 원년"이라고 규정하면서 "에틸렌 증설 규모는 수요 증가분을 계속 상회하고 있으며 특히 중국 내 수직계열화가 완성된 메이저 기업들이 고부가 제품군에서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한국의 점유율을 잠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산업연구원 역시 "원가 절감 수준이 아닌 중국이 단기간에 따라올 수 없는 소재로의 완전한 전이가 일어나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2026년 하반기 이후 국내 석유화학 단지의 가동 중단이 상시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국 석유화학 산업에 주어진 '골든타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시각인다.
한 산업계 관계자는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인 친환경 소재나 고객사 공정 자체를 혁신할 수 있는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는 등 명확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