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익기의 혁신은 대부분 미국 국방부를 통해 이루어졌다.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UH-1 휴이를 도입한 이후 꾸준히 회전익기를 발전시켜왔다. 21세기 들어 전장이 확대되고 더 위협적인 방공망이 등장하면서 미군의 회전익기 전력은 큰 위협에 처했다.
미 국방부는 기존 회전익기를 대체하기 위해 FVL(Future Vertical Lift, 미래수직이착륙)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틸트로터기와 헬리콥터가 경쟁한 차세대 수직이착륙기 프로젝트
FVL 프로그램은 범용 헬기 UH-60, 공격용 AH-64 아파치, 수송용 헬기 CH-47 및 특수전용 등 5종의 회전익기를 차세대 플랫폼 계열로 교체하는 장기 전략의 일환이다. 차세대 고속 회전익 기술 실증은 두 가지 구조의 기체가 경쟁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벨(Bell)의 V-280 밸러(Valor)는 기존 틸트로터(Tiltrotor) 기체인 V-22 오스프리의 기계적 복잡성을 획기적으로 줄여 엔진을 동체에 고정하고 이륙, 비행 모드에 맞춰 로터, 기어박스만 기울이는 3세대 틸트로터기였다.
또 다른 기체는 시코스키-보잉(Sikorsky-Boeing)의 SB-1 디파이언트(Defiant)로 상하 2개의 메인 로터가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동축반전 로터로 양력을 얻고, 기체 후방에 장착한 전진용 프로펠러로 추진력을 얻는 복합헬리콥터(compound helicopter)였다. 2017년 이후 두 종류의 기체는 모두 초도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저속, 저고도로 비행하는 회전익기의 생존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다. 휴대용 대공미사일 시스템(MANPADS), 저가형 드론, 전자전 체계가 결합된 환경에서 기존 헬리콥터 전력은 극히 취약한 표적으로 전락했다. 같은 임무를 더 낮은 위험으로 수행할 수 있는 무인기(UAV)와 M142 하이마스(HIMARS) 등 장거리 정밀타격체계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유인 헬리콥터에 투자할 전략적 명분도 약화됐다.
반면 틸트로터 기체의 필요성은 커졌다. 전장 후방 깊숙이 병력과 장비를 투입하는 장거리 기동 강습 임무에는 여전히 유인 플랫폼이 필수적인데 고속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틸트로터기를 대체할 설계안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 국방부는 정찰, 공격은 무인기가 맡도록 하고 병력, 물자를 운반하는 기동 강습은 틸트로터기가 담당하는 이원화된 전력 체계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30여 년간 V-22 오스프리를 운용하면서 축적한 신뢰를 바탕으로 미 국방부가 틸트로터 기술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21세기의 첫 전략적 선택은 틸트로터 ‘MV-75 샤이엔2’
틸트로터 기술은 미군이 일찍부터 주목한 솔루션이었다. 헬리콥터의 수직이착륙 능력과 고정익 항공기의 고속·장거리 순항 능력을 하나의 플랫폼에 통합한 틸트로터의 잠재력은 수십 년의 연구개발 끝에 V-22 오스프리가 실전 배치되면서 현실화됐다. V-22의 전력화 경험은 틸트로터 기술의 성숙도를 높이는 동시에 기계적 복잡성과 유지비 이슈 등 틸트로터 방식 플랫폼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를 제기했다.
틸트로터기는 헬리콥터, 멀티콥터와 비교할 때 다양한 장점을 갖는다. 순항 속도 측면에서 틸트로터기는 480~560km/h에 이르러서 250~300km/h인 헬리콥터 대비 약 2배, 80~160km/h인 멀티콥터 대비 약 3~5배 빠르다. 항속거리 역시 틸트로터기가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중간 급유 없이 비행할 수 있는 거리가 헬리콥터로는 달성 불가능한 약 3500km 이상에 달한다. 로터를 전진 방향으로 기울이면 고정익 항공기와 동일한 원리로 추진력을 생성하기 때문에 고속 순항 비행 구간의 연료 효율도 헬리콥터에 비해 크게 향상된다.
단점도 있다. 먼저 기계적 복잡성이 높아 정비하기 까다롭다. 로터 틸팅 메커니즘, 나셀(nacelle) 회전 시스템 등 복잡한 동력 전달 계통 때문이다. 다만 엔진까지 틸팅되는 기존 틸트로터기인 V-22 오스프리와 달리 V-280은 로터만 틸팅되고 엔진은 날개에 고정돼 있는 방식이므로 정비 부담은 다소 완화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동일 중량 대비 호버링 효율도 상대적으로 낮다. 틸트로터는 주날개인 로터의 면적이 헬리콥터보다 작아 저속 기동, 정밀 기동 상황에서는 헬리콥터보다 불리하다. 전환 비행 구간에서의 취약하다는 틸트로터 방식 특유의 단점도 있다. 수직 이착륙하는 헬리콥터 모드에서 수평 비행하는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는 과정(conversion corridor)에서 운용상 제약이 발생하고, 조종하기도 어려워 사고 위험성이 높다. 틸트로터기의 단가도 헬리콥터 대비 비싸다. 개발 계획 초기(2018년 기준)에 추산된 기체 가격은 UH-60 다목적 헬리콥터보다 높은 대당 약 4300만달러에 달했다.
그래도 헬리콥터보다 전략적으로 우세하다고 인정받은 벨 V-280은 2017년 12월 초도 비행에 성공한 후 약 5년간의 기술 시범 비행을 통해 시속 520km의 순항속도 달성, 플라이바이와이어 제어 시스템 검증 등 요구 조건을 충족시켰다. 2022년 12월 미 육군은 벨과 공식 계약을 맺고 V-280 기반으로 설계된 신형 틸트로터기에 MV-75 샤이엔2(Cheyenne II)라는 공식 명칭을 부여했다. 2024년 8월에는 시제기 6대 제작이 승인됐다.
차세대 틸트로터기인 MV-75 샤이엔2는 롤스로이스의 터보샤프트 엔진 2개를 장착하고 있고 최대 순항속도 560km/h를 기록했다. 헬리콥터보다 훨씬 높은 수송 능력을 갖춰 최대 이륙중량 26톤, 화물탑재량 5.5톤, 완전무장병력 12명 이상 수송 가능하다고 한다. 현재 다방면에서 사용되는 중형 헬리콥터 UH-60 블랙호크와 비교하면 MV-75는 속도 면에서나 행동 반경에서나 최소 2배 이상 우수하다. 이는 단순한 수치의 향상이 아니라 기존 블랙호크로는 접근 불가능했던 작전 지역에 대한 직접 기동 강습이 가능해진다는 전술적 의미를 갖는다.
MV-75에서 주목할 혁신적 설계 포인트는 고정 엔진(fixed engine)이라는 점이다. V-22는 로터와 엔진 전체가 함께 회전하는 구조여서 구동 계통의 구조가 복합해 높은 정비 부담을 초래했다. 반면 MV-75는 엔진을 동체에 고정하고 어셈블리와 기어박스만 기울이는 구조이므로 기계적 복잡성이 대폭 감소한 구조이다. 덕분에 엔진 정비도 원활하고, 정비 주기가 늘어나며, 장기 운용비용도 절감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 육군의 공식 일정에 따르면 2026년 시제기 비행 시작, 2028년 생산 개시, 2030년 일선 배치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수천 대 규모의 회전익기 교체가 예정돼 있어 MV-75는 향후 수십 년간 미군 회전익 전력의 중추를 형성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적 파급 효과도 주목된다. 한국 기업 KAI가 벨과 틸트로터 협력 의향을 발표하는 등 관련 기술은 한국 차세대 고속 기동 헬기(XUH, HSMUH) 사업에 대한 기술이전 및 공동 개발의 기반으로도 부상하고 있다. 틸트로터를 중심으로 한 FVL의 전략적 선택은 향후 동맹국 회전익 전력 현대화를 선도하는 가늠쇠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V-22 오스프리에서 MV-75 샤이엔2로 이어지는 계보는 민수 산업에서도 수직이착륙 플랫폼의 미래가 틸트로터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임을 예고한다. 틸트로터는 차세대 회전익 기술의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유인 플랫폼이 필요한 경우에 틸트로터의 운항 속도 및 항속거리상 우위는 대체 불가능하다고 인정받은 것이다.
진석용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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