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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트럼프가 가도 ‘아름다운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안선희 칼럼]

장난감부터 전기차까지 제조업의 거의 전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이제 인공지능(AI) 같은 최첨단 기술까지 넘보고 있다. 어떤 세력이 집권하더라도 이런 흐름을 외면하거나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트럼프식...

지난 17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성 패트릭의 날 행사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있다. EPA 연합뉴스안선희논설위원실장“수년 동안 일본인들은 (미국이 공짜로 제공하는 덕분에) 막대한 방위 비용에 구애받지 않고 전례 없는 흑자를 기록하면서 강력하고 활기찬 경제를 구축해왔다. … 미국이 아닌, 이 부유한 나라들에 ‘세금을 물리자.’”1987년 9월2일 41살의 부동산 개발업자 도널드 트럼프가 뉴욕타임스 등에 자비를 내고 실은 전면광고의 한 대목이다. 지난해 1월 대통령에 다시 취임한 뒤 전세계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관세전쟁’의 맹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40년이 넘은 트럼프의 ‘신념’을 고려하면, 미 연방대법원이 상호관세를 무효화할 수 있다는 전망에 잠시나마 ‘관세전쟁이 누그러지지 않을까’ 바랐던 것은 얼마나 순진한 기대였나. 아니나 다를까, 지난달 대법원의 무효 판결이 나오자 미 정부는 새 관세를 부과할 구실을 찾기 위해 지난 11일 한국 등을 상대로 무역법 301조 조사를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관세합의보다 혹시 더 높은 관세를 맞게 되지 않을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미-이란 전쟁에 파병을 하지 않으면 보복으로 관세 카드를 꺼낼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트럼프는 남은 임기 내내 결코 관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3년 뒤 트럼프의 임기가 끝나면 이 모든 소동이 가라앉을까. 다시 ‘평화로운’ 자유무역 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이 끝난 뒤 20여년, 세계화의 절정기였던 시기. 미국은 첨단 기술 개발과 금융, 서비스업에 집중하고, 제조업 중 고부가가치 산업은 한국과 독일 대만 등이, 저부가가치 산업은 중국이 맡았던 행복한 분업의 시기.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에서 3만달러로 높아지고, 삼성전자·현대차 등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 잡은 시기.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미국 정치권의 비주류였던 트럼프를 두번이나 대통령으로 밀어 올린, 미국 사회의 세 갈래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세계화 패자들의 분노다. 미국의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가 발표한 그 유명한 ‘코끼리 곡선’을 보면, 세계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중국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신흥국가들의 중간계층과 미국 등 선진국의 고소득층이었다. 이들은 1988~2008년 소득 증가율이 70%에 달했다. 반면 선진국 중하위층의 소득 증가율은 0~20%에 그쳤다. 이들이 바로 ‘러스트 벨트’의 백인 노동자들, 트럼프가 파고든 계층이다.둘째는 제조업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이다. “번영하는 미래에는 융성하는 제조업이 반드시 필요하다”(트럼프 1기 무역대표부(USTR) 대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헤지펀드 거물 존 아널드는 “미국은 발명하는 역량이 있고, 중국은 만드는 역량이 있다. 둘 다 하는 방법을 먼저 파악하는 나라가 앞으로 초강대국이 된다”(2024년)고 단언했고, 미국 민주당에 ‘생산하는 진보’가 돼야 한다고 촉구하거나(‘어번던스’), ‘변호사의 나라 미국, 엔지니어의 나라 중국’이라는 프레임으로 정체된 미국을 질타하는(‘브레이크넥’) 책들이 지난해 나란히 인기를 끌었다.셋째는 중국의 위협이다. 미국은 한국이나 대만처럼 중국도 “대중이 경제적 유인을 얻으면 민주주의로 향하는 흐름은 더욱 거세지리라 생각”(조지 H. W. 부시 대통령, 1989년)했다. 1979년 중국과 수교한 뒤, 대중 투자와 무역을 확대했고,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허용했다. 하지만 놀라운 경제 성장에도, 중국의 민주화는 진행되지 않았다. 2012년 집권한 시진핑은 공산당 통치 체제를 강화했고, ‘중국몽’을 내세우며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고 있다. 장난감부터 전기차까지 제조업의 거의 전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이제 인공지능(AI) 같은 최첨단 기술까지 넘보고 있다.어떤 세력이 집권하더라도 이런 흐름을 외면하거나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트럼프식 무지막지한 방식이든, 보조금 지급 같은 좀 더 온건한 방식이든, 미국의 기술 패권과 시장, 일자리를 지키려는 보호무역주의적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수출·제조업·대기업 주도 성장’이라는 한국의 기존 성장 전략은 거센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발명하는 역량과 만드는 역량을 모두 가진 나라’가 되려는 미·중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리 기업들은 쉽지 않은 싸움을 벌여야 한다. 최대 수출시장인 미국 시장의 장벽은 계속 높아질 것이다. 삼성전자, 현대차 등은 ‘한국 기업’이라기보다 ‘글로벌 기업’의 정체성이 점점 강해지며, 한국 내 투자와 고용을 줄여나갈 것이다. 그들은 계속 잘나갈 수 있지만, 그 돈은 주주에게만 흘러가지 한국 전체에 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는 끝났고, 우리는 깊은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지난 17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성 패트릭의 날 행사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있다. EPA 연합뉴스
지난 17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성 패트릭의 날 행사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있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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