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컴퓨터 수출 급증에도 세트 가격 상승과 교체수요 둔화 가능성 확대
“칩 확보 경쟁, 기업이익 개선 이면에 생산차질·수요위축 리스크 공존”
자동차 반도체 쇼티지의 교훈…가격은 안 내려오고 교체주기는 더 길어진다
◆…2026년GTC에 전시된 SK하이닉스 반도체 칩[사진=연합뉴스]
반도체 가격 급등이 한국 수출과 기업이익 전망을 밀어올리는 이면에, 글로벌 IT 완제품 가격 인상과 소비 둔화가 예견된다는 진단이 나왔다. 메리츠증권은 최근의 '칩플레이션(Chipflation)'을 단순한 업황 개선이 아니라, 매크로 차원의 수출 호조와 마이크로 차원의 수요 훼손이 동시에 진행되는 비대칭 국면으로 진단했다. 반도체가 한국 수출을 견인하고 있지만, 메모리 가격 급등이 스마트폰·노트북 등 세트 가격으로 전가될 경우 결국 소비자의 교체 수요를 약화시키고 생산 차질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24일 발표한 메리츠증권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칩플레이션의 밝은 면은 분명하다. DDR4와 NAND flash 가격이 지난해 8월 말 이후 큰 폭으로 뛰면서 한국의 반도체 및 컴퓨터 관련 수출은 급증했고, 상장사 이익 추정치 역시 빠르게 상향 조정되고 있다. 실제로 2월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은 37.3%까지 상승했고, 3월 1~20일에도 35.0%를 기록했다. 컴퓨터 주변기기를 포함하면 비중은 40% 안팎에 달한다. 메리츠증권은 이를 한국 수출의 전례 없는 반도체 쏠림 현상으로 해석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무선통신기기 수출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3개월간 무선통신기기 수출은 38.8% 증가했고, 최근에도 두 자릿수 증가세를 이어갔다. 다만 메리츠증권은 이를 단순한 최종 수요 회복으로만 보지 않았다. 고가 완제품 수출이 급증한 배경에는 칩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선제 생산에 나서고, 기존 재고를 앞당겨 소진하는 움직임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겉으로는 수출 호조지만, 실상은 가격 급등 이전에 물량을 확보하려는 방어적 행태일 수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칩 가격 상승이 세트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다. 메리츠증권은 미국 생산자물가에서 PCB와 컴퓨터 스토리지 디바이스 가격이 연초 이후 빠르게 오른 점에 주목했다. 아직 소비자물가에는 영향이 제한적이지만, 글로벌 IT 업계에서는 메모리 가격 급등이 스마트폰과 노트북 가격을 밀어올릴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메모리 비중 확대는 완제품 원가 구조를 크게 훼손해, 제조사로 하여금 가격 인상이나 사양 조정, 판매 믹스 변경을 선택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이다.
메리츠증권은 여기서 더 큰 위험을 소비자 측면에서 찾았다. 미국 가계의 실질 구매력 증가세가 둔화되는 가운데, IT 소비재와 내구재 소비는 점차 물량보다 가격 상승에 의존하는 모습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소득층의 자산효과는 정점을 지나고, 중저소득층은 인플레이션 장기화 속에 저축 여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스마트폰과 노트북 가격이 추가로 오르면 소비자는 더 낮은 사양의 제품을 선택하거나 아예 교체를 미룰 가능성이 높다. 결국 칩플레이션이 반도체 업종에는 호재일 수 있어도, 세트 수요에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게 메리츠증권의 시각이다.
이 같은 우려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메리츠증권은 2020~2022년 자동차 반도체 쇼티지를 제시했다. 당시 차량용 반도체의 원가 비중은 높지 않았지만, 필수 부품인 탓에 확보하지 못하면 생산 자체가 멈췄다. 그 결과 신차 생산 차질과 재고 감소가 나타났고, 신차와 중고차 가격은 급등했다. 더 중요한 것은 쇼티지가 해소된 뒤에도 가격이 이전 수준으로 충분히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메리츠증권은 이를 가격의 하방 경직성으로 해석하며, 이번 칩플레이션 역시 한 번 오른 IT 세트 가격이 쉽게 내려오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메리츠증권의 결론은 명확하다. 지금의 칩플레이션은 반도체·컴퓨터 수출 확대와 이익 개선이라는 '명(明)'을 만들고 있지만, 동시에 세트 가격 상승, 생산 차질, 교체수요 둔화라는 '암(暗)'도 키우고 있다. 특히 빅테크와의 칩 확보 경쟁에서 밀리는 업체들은 가격 전가를 넘어 실제 생산 차질에 직면할 수 있고, 최종 소비자는 높아진 가격 탓에 제품 교체 주기를 비자발적으로 늦출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번 반도체 호황은 업종별·기업별로 체감 온도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으며, 투자 판단에서도 반도체 업황의 수혜와 세트 수요 위축의 부작용을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 메리츠증권의 메시지다.
[알림] 본 기사는 해당 증권사의 분석보고서를 토대로 정보 제공 차원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투자시 투자자 자신의 판단과 책임하에 최종결정을 하시기 바라며 어떠한 경우에도 투자자의 주식투자의 결과에 대한 법적 책임소재의 증빙자료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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