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 난 파프리카, 두 쪽 양송이, 다리 셋 당근. 못생긴 외형만으로 버려지던 농산물이 ‘구독’이라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어글리어스는 소비자 경험을 최우선에 둔 설계를 바탕으로 못난이 농산물을 일상 소비로 전환하며 80만 구독자를 확보했다. 그 뒤에는 유통 구조를 재설계한 전략이 있었다.
최현주 캐비지 대표는 사업 초기 매주 고객 설문을 진행할 정도로,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집중했다. 최영재 기자
택배 박스를 열면, 오밀조밀 친환경 봉투에 담긴 유럽 상추와 파프리카 등 다양한 채소가 눈에 들어온다. 구멍이 뚫린 작은 박스에 담긴 칵테일 토마토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박스 한쪽에는 “건강하게 자란 친환경 농산물이 외형만으로 버려지는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는 대표의 메시지와 ‘이번 주 채소 레시피’가 적힌 종이도 들어 있다. 2주에 한 번 집으로 배송되는 ‘어글리어스’다. 이른바 ‘못난이’ 채소를 큐레이션해 구독 형태로 제공하는데, 평소 접하기 어려운 채소들까지 함께 담겨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못난이 농산물’에 대한 관심은 해외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포브스코리아 4월호에 소개된 미국의 미스핏츠 마켓도 지난 2020년 연 매출 1억6000만 달러에서 최근 5억 달러(약 746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어글리어스를 구독 중인 소비자도 지난해 50만 명에서 올해 80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 4월 8일 만난 ‘어글리어스’ 운영사 캐비지 최현주 대표는 최근의 성장세에 대해 ‘재구매 루프’를 만든 것이 주효했다고 돌아봤다.
“운도 있었지만, 비즈니스적으로 보면 가장 큰 성장 요인은 ‘재구매 루프’를 만든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에도 못난이 농산물을 판매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대부분 단발성 이벤트에 그쳤고, 농가를 돕자는 취지의 일회성 소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속적으로 유통되고 소비되는 구조, 즉 시장 자체가 없었던 셈입니다. 실제로 못난이 농산물은 생산은 되지만 유통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단발성 판매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통·소비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구독 모델을 도입했습니다. 여기에 입소문이 더해지면서 확산이 이뤄졌습니다.”
‘착한 소비’ 아닌 ‘일상 소비’로
어글리어스의 재구매율은 80%가 넘는다. 최 대표는 “한 번 구매한 뒤 다음 구매로 이어지는 비율은 최대 87% 수준에 이른다”고 부연했다.
“일반적으로 과일 한 박스를 사면 소진 기간이 길고 구매처도 많아 반복 구매로 이어지기 어렵지만, 어글리어스는 제철 식재료를 큐레이션해 제공하기 때문에 다음 박스를 기다리게 되는 구조입니다. 소비자들끼리 활용 방법을 공유하면서 일상적인 소비로 자리 잡은 것도 재구매율을 높인 요인입니다.”
만약 ‘착한 소비’에만 의존했다면 성장의 지속성은 짧았을 것이란 판단이다. 최 대표는 “결국 중요한 것은 소비자”라며 “공급자만 보고 사업을 하면 구조는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초기에는 매주 고객 설문을 진행할 정도로,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집중했다”고 강조했다. 소비자에 집중한 방식은 적중했다.
“개발자와 물류팀을 포함한 전 직원이 고객을 직접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간담회도 열었죠. 그 결과 소비기한 안내, 레시피 제공, 제철 식재료 추천, 소용량 구성 등 현재 운영하는 서비스의 주요 기능 대부분이 고객 의견에서 나왔어요. 핵심은 집에서 남김없이 소비할 수 있도록 돕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소비자를 중심에 둔, 이 같은 접근은 그의 창업 과정에서 얻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최 대표는 지난 2021년 캐비지를 창업했다. 심지어 두 번째 창업이었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는 한때 공기업에 몸담기도 했지만 정해진 경로를 따르는 삶에 의문을 느끼고 퇴사를 결심했다. 최 대표는 “내가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며 “유학을 준비하던 중 예술가들이 더 인정받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 첫 창업에 나섰다”고 말했다. ‘13플레이스’라는 플랫폼을 만들어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판매했지만, 기술력과 수익 구조에 대한 한계로 2년 반 만에 사업을 접었다. 최 대표는 “첫 창업을 통해 ‘공급자에만 집중하고 소비자를 외면하면, 결국 구매자가 없어 구조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전했다.
이 경험은 방향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최 대표는 대학원 진학 대신 다시 현장 학습을 택했고, 다른 스타트업에 합류해 기획자로 일하며 비즈니스 구조와 기술, 벤처 생태계를 익혔다. 이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2021년 캐비지를 창업했다.
밭에서 시작된 질문
그렇다면 왜 ‘못난이 농산물’이었을까. 최 대표는 “못난이 농산물이 성공할 사업이라고 판단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농산물 유통 구조를 접하고 농가를 직접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못생긴 외형만으로 농산물이 대량 폐기되는 현실을 목격했다. 이 과정에서 ‘비합리적인 구조인데 왜 아무도 문제 삼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이를 해결해볼 만한 문제라고 판단해 창업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식품산업의 비효율성에 주목해 미스핏츠 마켓을 창업한 아비 라메시도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최 대표는 “첫 창업 실패 경험이 있었던 만큼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고, ‘이 문제에 내 인생을 걸 수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다”며 “6개월 동안 회사를 다니며 공부하고 농가를 찾아다닌 끝에,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문제라고 판단해 창업을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 대표가 설계한 것이 바로 현재의 사업 구조다. 전체 매출의 90% 이상은 정기 배송 모델로, 농가에서 농산물을 직접 사입해 물류센터에서 포장한 뒤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D2C(Direct to Consumer) 구조다. 나머지 약 10%는 농가가 직접 배송하는 상품을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는 방식이다.
가격 구조도 핵심 요소다. 기존 유통에서는 A급 농산물만 제값을 받고, 나머지는 헐값에 팔리거나 폐기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어글리어스는 A급과 B급을 통합해 사입함으로써 농가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수익을 안정화했다.
“기존 유통 구조에서는 A급 농산물 70%를 100원에 판매하더라도, 나머지 30%는 팔릴지조차 불확실해 헐값에 넘기거나 폐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20원도 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래서 저희는 A급과 B급을 따로 나누는 대신 통합해 사입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예를 들어 70%는 100원, 30%는 20원에 거래하는 구조가 아니라, 전체를 묶어 평균 70원 수준에 사입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농가 입장에서는 작업 부담과 불확실성이 줄어들고, 전체 수익도 오히려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일부 외형이 고르지 않은 농산물이 포함될 수 있지만, 신선도나 영양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실제로 받아보면 ‘생각보다 못생기지 않았다’는 반응이 더 많습니다. 이런 균형을 맞추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앞으로는 PB 상품을 확대하는 것이 과제다. 최 대표는 “채소와 과일은 이미 공급 기반이 안정적으로 구축됐지만, 원물 판매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며 “가공을 거치는 것이 더 적합한 품목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PB 상품을 통해 더 많은 원물을 상품화할 수 있고, 브랜드의 가치와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토마토주스와 잼 3종을 테스트로 출시했고, 올해 추가로 3종을 선보일 예정이다. 최 대표는 “지난해 선보인 100% 유기농 토마토 즙은 첨가물 없이도 높은 재구매율을 기록하고 있고, 잼도 원물 식감을 살린 제품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최현주 캐비지 대표는 “친환경 소비는 불편하거나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앞으로는 편리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인데 그 결과가 친환경 소비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확장 대신 지속가능성 택했다
이러한 확장 속에서도 회사는 성장 속도 조절에 나섰다. 지난 2024년 매출은 전년 대비 49% 증가한 121억7000만원을 기록했으나, 2025년에는 약 125억원으로 엇비슷한 수준을 기록했다. 최 대표는 “지난해에는 외형 성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며 “지속 가능한 사업을 지향하면서도 수익을 내지 못하는 구조는 모순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스타트업은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지만, 신선식품을 다루는 사업 특성상 과도한 확장은 오히려 소비자 경험을 해칠 수 있다는 점을 체감했어요. 물류와 품질관리 등 기반을 충분히 갖추지 않으면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속도보다 구조를 다지는 데 집중했고, 앞으로는 질적 성장을 통해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만드는 데 주력할 계획입니다.”
캐비지는 현재까지 약 38억원 규모 투자를 유치했다. 올해는 시리즈A를 통해 추가 투자를 진행 중이다. 최 대표는 “투자자들에게 친환경 그로서리 시장의 성장 가능성과 브랜드 경쟁력을 강조한다”며 “특히 20~40대 중심의 고객층과 소용량·구독 기반 모델을 통해 차별화된 시장을 구축했다는 점, 높은 재구매율로 입증된 소비자 충성도를 강점으로 내세운다”고 설명했다. 확보한 자금은 오프라인 매장 확장 등 유통망 확대에 활용할 계획이다. 내년에는 우선 서울·수도권 지역에 오프라인 매장 2곳을 열 예정이다.
빠른 성장과 확장 과정에서 고민도 적지 않았다. 특히 사업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지점은 ‘균형을 맞추는 일’이었다. “소비자는 더 낮은 가격을 원하고, 공급자는 안정적인 수익을 원하기 때문에 산지와 도시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인지가 늘 고민이었습니다. 또 다른 고민은 친환경과 품질 사이의 균형입니다. 배송 과정에서 포장재를 줄이고 싶어 처음에는 포장 없이 농산물을 보내기도 했지만, 오히려 상품이 훼손돼 버려지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농산물을 안전하게 보내면서도 포장재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지금까지 5년째 이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글리어스는 매주 테스트를 반복하고 새로운 친환경 소재를 찾아 적용하는 과정을 계속하고 있다. 최 대표는 “현재 사용하는 생분해 비닐이나 통풍 구조를 고려한 박스도 모두 자체적으로 개발한 것”이라며 “비용은 더 들지만, 환경을 고려한 선택을 이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최 대표만의 경영철학이 있는지 묻자, “지역사회와 환경에 긍정적인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비즈니스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 기업이 바라봐야 할 ‘소비자’의 범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구매자와 공급자를 떠올리지만, 저는 환경과 지역사회도 우리의 소비자라고 봅니다. 기업이 수익을 낸 뒤 기부나 사회공헌으로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 활동 자체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런 구조가 사회를 더 지속 가능하게 만들고 시장 자체를 키우는 일이라고 봅니다. 이는 주주 수익과도 충돌하지 않는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역사회와 환경에 긍정적인 선순환을 만드는 비즈니스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우리의 경영철학이자 전략입니다.”
이에 따른 궁극적인 목표로는 ‘친환경 소비의 일상화’를 제시했다. 그는 “현재 친환경 소비는 일부 소비자가 불편을 감수하거나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러한 장벽을 없애고, 편리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인데 그 결과가 친환경 소비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단순한 식품 구독을 넘어 친환경 생활 전반으로 확장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그는 “현재는 식품 중심이지만, 향후에는 세제나 비누 등 일상용품까지 영역을 넓혀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최 대표는 기존에 써왔던 ‘못난이 농산물’이라는 표현에도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그는 “사실 ‘못난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도 아픈 부분”이라며 “외형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품질까지 낮게 평가되는 인식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자연에서 자란 농산물은 날씨와 환경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 정상”이라며 “오히려 획일적으로 생산된 농산물보다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라는 가치를 더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못난이’라는 단어는 유통 구조의 문제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현일 뿐, 품질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앞으로는 산지에서의 이야기와 농산물의 본질적인 가치를 더 많이 전달해, 소비자들이 더욱 건강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