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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최영재 천양피앤비 대표 “한지, 산업화로 전통의 미래 열어야”

최영재 천양피앤비(주) 대표가 한지의 현대 산업화와 인쇄용 한지 개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영재 천양피앤비 대표 “한지, 산업화로 전통의 미래 열어야”

최영재 천양피앤비(주) 대표가 한지의 현대 산업화와 인쇄용 한지 개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로 알려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까지. 오랜 세월 우리의 지식과 문화를 지켜온 기록의 바탕에는 한지가 있었다. 질긴 닥나무 섬유로 만든 한지는 수백 년의 시간을 견디며 기록과 문화를 후대에 전달해왔다.

하지만 디지털과 대량 인쇄가 일상이 된 오늘날 한지는 오히려 출판·인쇄 현장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종이가 됐다. 닥나무 섬유의 불규칙한 결과 높은 통기성·흡수성, 부드러운 물성이 현대식 오프셋 인쇄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한계를 넘어 한지를 다시 ‘현대의 종이’로 만들기 위한 도전이 전주에서 이어지고 있다. 1966년 창업해 한지 제조의 명맥을 이어온 천양피앤비(주)다. 창업주인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한지에 입문한 최영재 대표는 닥나무 껍질을 벗기는 일부터 종이뜨기, 기계 생산, 영업, 공장장까지 현장을 두루 거쳤다. 그렇게 한지와 함께한 세월만 37년 가까이 됐다.

최 대표는 “한지는 기록을 통해 교육과 문화를 전달해 온 중요한 매개체였다”며 “이제는 전통의 뿌리를 지키면서도 생활 속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전통과 현대를 연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6종 한지 에디션 책

▲ 10년 넘는 R&D…‘인쇄 안 되는 한지’ 한계 넘다

천양피앤비가 인쇄용 한지 개발에 뛰어든 데는 한지 시장의 변화가 있었다. 과거 주력 제품이던 창호지와 서화용지 수요가 줄면서 한지의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했다. 최 대표가 주목한 분야가 출판·인쇄였다.

한지와 현대 인쇄의 만남은 그 자체로 이상적인 조합이지만, 상용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기존 한지를 오프셋 인쇄기에 넣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통기성이 높은 한지는 자동 급지 과정에서 여러 장이 한꺼번에 들어갔고, 부드러운 물성 때문에 주름도 발생했다. 불균일한 닥섬유가 인쇄기 블랭킷을 손상시키거나 높은 흡수성으로 잉크가 번지는 문제도 있었다.

최 대표는 “지금도 한지를 인쇄한다고 하면 ‘안 된다’며 꺼리는 인쇄소가 있을 정도”라며 “통지성과 잉크 번짐, 종이의 강도 등 여러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개발에는 10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2010년부터 자체 연구개발(R&D)을 집중해 왔다. 그 결과 한지 고유의 질감과 내구성을 유지하면서 현대식 인쇄기에 적용할 수 있는 인쇄용 한지가 완성됐다. 현재는 출판물과 패키징 인쇄 시장에 최적화된 인쇄용 한지를 생산해 책의 내지와 표지, 간지 등에 맞춰 공급하고 있다.

한지로 제작된 '압록강은 흐른다'

▲ 한지가 다시 책으로…한지 에디션 ‘상용화’ 성과

기술력은 실제 출판시장에서 성과로 이어졌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을 중심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를 통해 ‘연어’, ‘압록강은 흐른다’, ‘우리는 사랑하기 좋은 팔을 가졌구나’, ‘백석시전집’ 등 총 6종의 한지 에디션이 제작됐다.

작품마다 백색과 미색, 무늬가 들어간 종이 등 서로 다른 한지를 선택하고 두께와 원료에도 변화를 줬다. 현대적인 인쇄·디자인에 전통적인 제본 방식을 접목하면서 기존 책과는 다른 결과물이 탄생했다.

최 대표는 “샘플을 받아본 분들이 ‘한지가 이렇게 발전했느냐’며 놀랐다”며 “실제 인쇄 결과를 보고 오히려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출판 관계자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한지 에디션은 높은 관심을 받았다. 특히 지원사업을 통한 특별판으로 끝나지 않고 일부 출판사가 천양피앤비의 한지를 직접 재 주문해 추가 제작에 나섰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다른 출판사들의 문의도 이어지면서 한지가 실제 시장에서 소비되는 상용 출판용지로 진입할 가능성을 확인했다.

대량생산 체제도 갖췄다. 현재 일반 양지보다 가격은 높지만 고급 수입 인쇄용지와 비교하면 격차가 크지 않다는 설명이다. 최 대표는 “수요가 늘고 생산량이 많아지면 원가를 낮출 수 있다”며 “자동화 생산체제를 갖추고 있어 대량생산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지로 인쇄한 책

▲ 유네스코 등재 발맞춰…“산업화가 전통 살린다”

한지는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며 중요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

최 대표는 등재가 한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산업 활성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화지와 중국 선지가 세계시장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만큼 한국도 한지만의 기술과 상품을 적극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 계승과 산업화는 따로 볼 수 없다. 산업이 활성화되면 자연스럽게 전통에 대한 관심도 커진다”며 “둘 다 중요하지만 지금 더 비중 있게 투자해야 할 분야를 꼽는다면 산업화다. 산업화가 돼야 전통도 함께 클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로 국산 닥나무 원료 문제를 꼽았다. 단순히 닥나무를 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최 대표의 생각이다. 수확한 닥나무를 삶고 표백·세척해 제지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가공 기반까지 갖춰야 한다.

특히 기계 한지는 대량의 원료가 필요한 만큼 생산과 가공의 기계화·규모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최 대표는 기업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만큼 정부와 지자체, 대학·연구기관, 기업이 함께하는 장기적인 연구개발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지로 인쇄한 책

▲ 교과서에서 첨단소재까지…한지의 미래 넓힌다

천양피앤비가 바라보는 한지의 미래는 책에 머물지 않는다. 이미 벽지와 장판 등 인테리어 소재와 파인아트용 한지를 개발·판매하고 있으며, 예술가·디자이너와 결합한 고부가가치 인테리어 소재로도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유네스코 등재를 계기로 해외 출판과 인테리어 시장 진출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한류와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한지와 연결해 일본 화지나 중국 전통 종이와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최 대표가 그리는 5년 뒤 한지는 더욱 일상적이다. 대표적인 목표가 교과서다. 아이들이 매일 사용하는 책에 한지가 쓰인다면 한지는 더 이상 특별한 전통 소재가 아닌 일상의 종이로 자리 잡을 수 있다.

10년 뒤에는 시선이 첨단 산업으로 향한다. 산업용 필터와 바이오 소재는 물론 화학섬유 기반 부직포를 대체할 수 있는 친환경 소재까지 한지의 가능성을 확장한다는 구상이다.

천년 동안 기록을 품었던 한지는 이제 현대의 인쇄기를 통과해 책이 되고, 생활소재를 넘어 미래 산업의 소재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최영재 대표는 “한지를 전통에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며 “미래에서 바라본다면 한지는 화학섬유를 대신할 수 있는 ‘친환경 부직포’이자 새로운 산업소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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