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전유물 파운드리, 이차전지에 접목… 40여 글로벌 고객사 확보
대기업 EV A/S·스타트업 양산 리스크 해결 ‘상호 보완적 밸류체인’ 구축
방산·로봇 등 특수 시장 공략 가동 2년 반 만에 ‘영업이익 흑자’ 달성
올 연말 음성 공장 증설… “확실한 흑자 구조로 2028년 상장 도전”
오덕근 JR에너지솔루션 대표. [사진=정재원 기자]
글로벌 배터리 공급망 재편이라는 격랑 속에서 ‘배터리 파운드리’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시장을 정면 돌파하는 기업이 있다. 바로 2022년 12월 출범한 JR에너지솔루션이다. 그동안 파운드리는 반도체 산업에서만 통용되는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JR에너지솔루션은 이를 이차전지 시장에 접목하며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올해 영업이익 흑자 전환을 앞둔 오덕근 JR에너지솔루션 대표를 음성 공장에서 만나 배터리 파운드리의 비전과 청사진에 대해 들어봤다.
▲ ‘배터리 파운드리’라는 생소한 특화 분야에 뛰어들며 창업을 결심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과거 SK이노베이션에서 배터리 관련 일을 했고 헨켈과 콘티넨탈 등 유럽 기업들과도 일을 해왔다. 그러다가 한 배터리 기업의 대표를 맡으면서 흥미로운 현상을 봤다. 완제품 셀(Cell)뿐만 아니라, 생산 공정의 반제품인 '전극'만 별도로 사 가는 업체들이 있었던 것이다.
대기업 시절의 상식으로는 전극과 셀은 당연히 한 공장에서 묶어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장의 숨은 수요를 보며 “좋은 비즈니스 모델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잘 가다듬어 파운드리(위탁생산)화 시킨다면 반도체의 TSMC 같은 거대한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고 직감했다.”
▲ 아이디어가 좋아도 거대 자본과 설비가 필요한 배터리 제조업을 스타트업이 시작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초기 인프라 구축과 투자 유치는 어떻게 했나.
“과거부터 업계 사람들을 만나보면 위탁생산 아이디어는 누구나 이야기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실행이다. 대규모 투자를 끌어올 수 있는가, 고도화된 라인을 구성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양산 역량을 갖춘 숙련된 인력을 모을 수 있는가라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과거부터 쌓아온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이차전지 업계를 가장 잘 아는 업계 관계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분들은 배터리 산업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사업 모델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보고 전략적 투자자로서 과감한 투자를 단행해 단기간에 1000억 원 규모의 펀딩에 성공했다.
사람과 축적된 노하우로 '제2의 JR에너지솔루션'을 표방하는 곳들과는 다른 진입장벽도 생겼다. 창업 초기, 함께할 제조 전문가를 영입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30년간 배터리 관련 기업 현장을 지킨 공장장, 국내배터리 대기업 외국 법인장을 지내며 산전수전을 겪은 전문가들이 삼고초려 끝에 합류했다. 파운드리 비즈니스에서 턴키로 남이 설계해 준 라인을 받아서 쓰는 회사는 망한다. 고객의 니즈에 맞춰 ‘믹서는 500L짜리로 하고, 코터는 3개 구간으로 나누자’는 식으로 라인의 스펙을 스스로 설계하고 짤 줄 아는 엔지니어가 필수적이다.
투자뿐만이 아니다. 주주로 참여한 이들의 세계 최고 수준 장비가 우리 공장에 설치됐다. 피엔티(PNT), 윤성F&C, 유진테크놀로지 등의 고도화된 검증 장비로 채웠다. 이제 40여 고객사 확보로 공장 가동률과 수율이 임계점을 넘었고, 고정비가 상쇄되면서 타사가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가격 경쟁력까지 갖추게 됐다. 이로 인해 회사가 설립된 2022년 말이 배터리 시장의 투자 심리가 꺾이기 시작하는 끝물이었지만, 불과 8개월 만에 공장을 완공하고 글로벌 고객사 물량을 확보해 즉시 생산에 돌입할 수 있었다.”
▲ 단순한 외주 가공과 파운드리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배터리 산업에서 파운드리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고 JR에너지솔루션은 어떤 시스템을 갖추고 있나.
배터리 전극 제조의 첫 관문인 믹싱 공정이 이루어지는 대형 설비 모습. 고객사의 요구에 맞춰 활물질과 도전재, 바인더 등을 정밀하게 배합한다.[사진=정재원 기자]
“단순히 남의 물건을 대신 만들어주는 외주가 아니라 전극과 셀 생산에 대한 완벽한 플랫폼을 제공하는 게 바로 파운드리다. 반도체 역시 CPU나 메모리 외에 자동차, 가전 등 수많은 곳에 다품종 소량으로 들어가면서 TSMC라는 거대한 파운드리 플랫폼이 탄생하지 않았나. 배터리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 플랫폼이 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모두 필요하다.
우리는 ERP(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은 물론, 자체 인하우스로 개발해 AI까지 접목한 생산관리시스템(MES)을 가동 중이다. 또한 자동차 고객사들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IATF 16949 품질 인증, ISO 27001 정보보안 인증, 환경과 안전 시스템까지 모두 구축했다. 고객의 니즈를 맞춰줄 수 있는 드라이룸, 클린룸 기반의 생산 환경과 이것을 통제하는 IT 시스템이 결합해 비로소 파운드리 플랫폼이 완성됐다.”
▲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이른바 대형 배터리 기업들과의 관계 설정이 궁금하다. 이들과 경쟁하는 것은 아닌가.
“전혀 아니다. 철저하게 그들과 상호 보완하는 관계다. 빅3 제조사와의 협업에 가장 필요한 단어는 ‘앞과 뒤’다.
우선 앞단은 R&D다. 과거 니켈·코발트·망간(NCM) 일변도일 때와 달리 지금은 리튬인산철(LFP), 나트륨, 리튬망간리치(LMR) 등 다뤄야 할 소재가 너무 많다. 대기업도 한정된 연구 라인만으로 이 모든 것을 소화하기 힘들다. 특히 수익성과 직결되지 않는 차세대 소재 테스트는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대기업들이 돈 버는 양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번거로운 앞단의 테스트와 소규모 양산은 우리가 맡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뒷단’인 A/S 시장이다. 자동차에 탑재된 배터리 셀은 통상 10년을 보증해야 한다. 만약 특정 전기차 모델이 단종됐다고 치면 이 차를 산 고객을 위해 대기업은 향후 10년 동안 간헐적으로 A/S용 셀을 생산해야 한다. 보통 대기업의 라인은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인데, A/S를 위해 라인을 수시로 멈추고 세팅을 바꾸는 것은 극도로 비효율적이다. 결국 이 A/S 소량 다품종 프로젝트를 파운드리인 우리가 해결하는 구조인 것이다.”
▲ 뛰어난 기술을 가졌지만 규모가 작은 배터리 팹리스 등 스타트업에도 JR에너지솔루션이 주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JR에너지솔루션의 현장 작업자들이 완성된 전극 롤이 수분에 노출되지 않도록 밀봉해 포장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사진=정재원 기자]
“이차전지 시장에서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이 바로 팹리스들이다. 기발한 소재와 기술을 개발해놓고도 시장에 내놓지 못해 고사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유럽의 노스볼트를 비롯해 수많은 배터리 업체들이 무너지는 가장 큰 이유는 양산 역량 부재다. 배터리 기술을 아는 것과 그것을 불량 없이 대량으로 찍어내는 양산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스타트업들은 투자할 막대한 자본도 양산을 통제할 숙련된 엔지니어도 없다. 본인들은 본업인 기술 개발과 고객 확보에만 집중하고 양산은 우리 같은 검증된 파운드리에 맡김으로써 양산 리스크를 제거할 수 있다.
기술 유출 등과 관련해서도 초기 우려도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없다. 앞서 언급한 ISO 27001 등 정보보안 인증을 탄탄히 갖춘 덕분이다. 최근 국내 대형 고객사가 60여 개 항목에 걸쳐 우리 회사의 정보보안 수준을 점검했는데, 100여 개 관리 업체 중 우리가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
▲ 최근 배터리 업계 전반의 실적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단기간에 영업이익 흑자를 낸 비결이 궁금하다.
“애초에 우리의 타깃은 메인 전기차 시장이 아니었다. 방산, 로봇, 드론, 선박, 특수 스마트폰 등 배터리가 필요한 곳은 무궁무진하다. 전기차 시장은 안전성 검증과 테스트에만 최소 2년, 양산까지 3~4년이 걸리지만 특수 시장은 6개월 안에 모든 세일즈 사이클이 끝난다. 단기적으로 빠르게 매출을 일으켜 공장 가동률을 끌어올리기에 최적화된 시장이다.
성과는 숫자로 증명된다. 현재 매출의 70%가 해외 수출에서 나온다. 지난해 2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고, 올해는 무난히 500만불 고지를 밟을 것으로 전망된다. 작년 자회사 포함 연결 기준 201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약 400억원 달성이 목표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수익성이다. 작년 이미 상각전영업이익(EBITDA) 기준 흑자로 돌아섰고,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누적 영업이익마저 완전한 흑자로 전환했다. 감가상각비와 고정비가 큰 제조업에서 가동 2년 반 만에 안정적인 영업이익률마저 달성한 것이다.”
▲ 이차전지 시장의 소재 트렌드가 NCM에서 LFP, 전고체, 나트륨 등으로 변하고 있다.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차세대 폼팩터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전극 공정은 흔히 요리에 비유할 수 있다. 요리의 재료(활물질)가 바뀐다고 해서 요리하는 냄비(장비)를 통째로 바꾸지는 않는다. 믹싱, 코팅, 프레스, 슬리팅이라는 전극 제조의 기본 공정은 소재가 바뀌어도 동일하다. 재료가 섞이지 않도록 냄비를 기가 막히게 잘 닦아내는 ‘클리닝 노하우’가 필수적인데, 이를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
최근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단연 나트륨 배터리다. 시장의 판도를 냉정하게 봐서 LFP는 이미 광물 채굴부터 전구체, 양극재까지 공급망 전체를 중국이 장악해 버렸다. 가격 경쟁력에서 이길 방법이 없다. 결국 한국과 미국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나트륨 배터리라고 본다.
LG에너지솔루션 등 대기업들도 나트륨 개발에 가장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우리 역시 주요 고객사들의 나트륨 배터리 전극부터 파우치 셀까지 직접 대량으로 생산해 주며 시장의 데이터를 가장 빠르게 축적하고 있다.”
▲ 현재 생산 라인의 규모와 공장 가동 현황, 그리고 향후 인프라 증설 및 글로벌 진출 청사진을 듣고 싶다.
“현재 가동 중인 1호기 전극 라인은 500MWh 규모다. 초기 고객들의 소량 검증과 다품종 셋업에 최적화된 준양산급 라인이다. 밀려드는 주문 탓에 현재 주야 2교대로 주말까지 반납하며 24시간 라인을 돌리고 있으며, 곧 3교대 체제로 완전히 전환할 예정이다. 전극 외에도 연간 10만 셀을 만들 수 있는 파우치 셀 라인, 군포 자회사의 모듈·팩 라인까지 완비해 밸류체인을 수직 계열화했다.
글로벌 확장은 이미 진행형이다. 올 연말까지 기존 1호기 옆 유휴 공간에 대량 양산에 특화된 1.5GWh 규모의 2호기를 신규로 깔아, 총 2GWh 수준으로 생산 능력을 대폭 끌어올릴 계획이다. 1호기에서 육성되고 검증이 끝난 대규모 양산 물량은 2호기로 넘겨 고속으로 뽑아내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것이다.
해외 진출도 다각화하고 있다. 수천억을 들여 유럽이나 미국에 직접 공장을 짓는 무모한 방식은 지양한다. 유럽의 모로우배터리나 ACC 등 현지 배터리 기업들과 협력해 그들의 남는 생산능력을 공동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미국 역시 자국 내 배터리 밸류체인 내재화를 필요로 해 음성 공장을 마더 팩토리로 삼아 전극을 수출하거나 현지 조인트 벤처를 설립해 진출하는 모델도 병행할 것이다.”
▲ 끝으로 JR에너지솔루션의 궁극적인 장기 비전과 기업공개 목표 시점이 궁금하다.
“단기적으로는 글로벌 방산, 로봇 등 특수 목적 시장에서 배터리 파운드리로서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는 것이다. 이를 발판 삼아 중장기적으로는 글로벌 빅3 제조사들의 EV A/S 시장 물량과 신소재 양산 물량으로 파이를 창출해낼 것이다. 상장은 오는 2028년을 목표로 굵직한 투자 자문사들과 스케줄을 조율 중이다. 사실 최근 이른바 ‘테슬라 요건’으로 불리는 이익 미실현 특례나 패스트트랙을 통해 우회 상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2028년까지 매출 2000~2500억 원 수준을 달성하고 확실한 영업이익 흑자 구조를 증명해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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