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극3특 국가균형성장 추진전략. 자료=지방시대위원회
최근 정치권과 언론을 중심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5극3특’과 행정통합이 이른바 ‘지역소멸’과 수도권 집중 문제의 해법처럼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지방 분권화가 공공서비스 개선이나 주민 권한 확대를 보장하지는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히려 주민자치와 지역 언론 등 민주적 견제 장치가 부족할 경우 지역 엘리트 권력만 강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의 이상윤 책임연구위원(노동건강연대 대표)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1980~1990년대부터 유럽과 제3세계 등에서 진행된 지방분권의 역사를 보면, 지방분권화를 해 지역 위기와 공공서비스가 개선된다는 특별한 증거가 없다는 점이 관련 학자들의 일관된 주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초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행정통합을 계기로 의료를 비롯한 공공서비스 측면에서 지방분권의 역사적 사례를 다룬 해외 논문들을 분석하는 세미나를 진행했다.
그에 따르면 분권화 담론은 소련 붕괴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 패러다임이 퍼진 1980~1990년대부터 본격 부상했다. 특히 국제금융기구와 고소득 국가들이 개발도상국에 개발 원조의 조건으로 지방분권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정부와 원조 기관들은 “지방정부가 공급 중심의 중앙 관료제보다 지역 수요에 더 민간하게 반응하고 지역 자원과 인구를 더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을 들며 ‘권한 이양’ 형태의 지방분권화를 선호했다고 한다. 이는 “주권 국가에 행정 구조와 정책 시행 절차, 정치체제를 어떻게 조직할지 요구한 근현대사의 새로운 현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외 분권화 실험, 왜 실패했나
이 위원은 해외 지방분권 사례에서 실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역 토호세력에 대한 통제 실패’를 꼽았다. 방글라데시의 경우 1980년대 군사정권이 ‘우파질라’라는 하위 행정구역을 신설하고, 지역 주민들이 직접 의장을 선출하고 지역 예산과 행정을 집행하도록 하는 분권화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예산과 권한 이양이 이뤄지자, 중앙 권력이 지역 토호 세력에 예산과 권한을 주는 대신 그들의 충성을 얻는 ‘후견 관계’가 형성됐다. 그 결과 분권화 이후 “(분권화의 결과) 하위 구청장과 관료들이 개발 자금의 30~40%를 횡령한 것으로 나타났다.
파키스탄 역시 2001년, 무샤라프 장군의 집권 뒤 각 지구에 막대한 권한과 예산을 이양하고, 각 행정단위 장을 직선제로 선출하도록 하는 지방분권화를 단행했다. 그 결과는 지방 시장으로 기존 지주들이 선출됐고, 지방 엘리트와 관료의 자금 횡령과 부패, 친인척 중심 정실인사가 심화됐다.
이 위원은 이 같은 사례를 담은 논문을 소개한 뒤 “중앙정치가 지역의 후견세력과 유착되어 있을 경우, 분권화는 ‘중앙권력과 지역 후견세력 간 짬짜미’만 강화할 뿐 실질적으로 주민에게 돌아가는 민주적 권력 이양이나 공공서비스 개선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성공 가른 건 ‘취약층 참여구조’와 ‘지역 언론’
지방분권이 성공한 소수의 사례도 있다. 학계는 인도 카르나타카주를 대표 사례로 꼽는다. 분권화 뒤 카르나타카주는 ‘판차야트’라 불리는 지방자치 기구에 실질 권한을 넘겼다. 이후 농촌 지역 주민과 사회 취약계층이 지역 의사결정 기구에 직접 진입하는 풀뿌리 주민자치다.
실패와 성공을 가른 요인은 ‘취약계층이 정치세력화와 이해관계를 반영할 제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건강한 지역언론이 존재했는지 여부였다고 한다. 이 위원은 “성공한 지역의 경우 개혁 이전부터 이미 ‘지역 민주주의 작동 메커니즘’이 존재했다”며 “목소리 없는 취약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정치세력이 있거나, 이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구조가 제도적으로 명분화해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이어 “또한 지역의 여론을 형성하고 현 상황을 반영하며 권력을 비판하는 지역 언론이 있을 경우, 지방분권이 긍정 영향을 발휘하는 소수의 사례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조국혁신당과 진보당을 비롯한 5개 야당과 251개 노동·시민사회단체는 2026년 2월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행정통합 특별법 속도전을 당장 중단하고 모든 논의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요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현재 추진되는 행정통합 역시 지방분권의 성공을 위해선 일정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위원은 “예산 자체를 분권화해 긍정적 효과를 거둔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거의 없다”며 “재정 기반이 취약한 지역에 ‘알아서 하라’고 하면 기존에 자원을 빼앗기거나 낙후됐던 지역은 더욱 어려워지고 불평등은 심화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재명 대통령이 올초 타운홀미팅에서 공공의료원 공약을 지켜달라는 울산 시민에게 ‘울산시장에게 얘기하라’고 답한 사례를 지적했다. “중앙정부가 확보한 세수를 지역에 재분배하는 메커니즘은 여전히 중요하며, 이를 보다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행정통합, 풀뿌리 주민 권력 확대가 먼저
지역 엘리트를 견제할 주민자치 역시 필수 조건으로 꼽힌다. 이 위원은 “대의제와 주민참여 제도를 통해 기존 토호나 후견 세력을 통제할 ‘주민의 발화 메커니즘’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는 7월1일 출범할 전남광주행정통합특별시를 규정한 전남광주통합특별법은 주민자치 측면에서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주민발안·주민소환 요건을 완화하라는 시민사회 요구는 반영되지 않았고, 주민투표 청구 요건은 ‘주민 20분의 1 동의’에서 ‘30분의 1’로 완화됐지만 통합 뒤 인구 규모가 크게 늘면서 실제 필요한 서명 수는 오히려 증가했다.
이 위원은 “지방분권과 지역 거버넌스라는 세련된 정치적 수사로 추진된 대부분의 정책 실험이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도 강조했다. 유럽 사례를 보면 분권화가 중앙 또는 지방 권력을 해체해 시장과 기업에 넘기는 민영화의 한 방식으로 작동했다는 것이다. 대표 사례인 독일 튀링겐주의 경우 1990년대 독일 통일과 유럽연합의 시장 자유화 영향으로 에너지기업을 매각해 민영화했다. 그러나 이후 잦은 소유권 변경과 서비스 질 저하, 비용 상승이 발생했고, 결국 튀링겐 산하 지자체들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기업을 재인수하는 ‘재공영화’에 나섰다.
전남광주통합특별법의 경우 전남광주특별시장에 국가의 외교와 국방, 사법을 뺀 모든 분야에 대한 권한을 단계적으로 이양하도록 하는 한편, 민간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를 골자로 한 ‘특례’ 조항을 250개를 담고 있다.
이 위원은 “정부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겠다’고 공언하는 상황에서 민영화를 수반하는 분권화가 추진된다면, 결국 공공서비스의 후퇴와 기업 특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한국은 다를 것’이라 주장할 수 있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세계 곳곳의 경험은 그런 예외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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