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義兵)
옳은 일을 위하여 일어난 군사
義 : 옳을 의, 兵 : 군사 병
▲ ▲조원기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 청주지회장
△오늘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고, 6일은 현충일이다. 현충(顯忠)은 두드러진 충절. 충렬을 현양(顯揚)함이다. 의병은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 나라를 구하는 민군(民軍)이다. 의병이 역사상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의 의병과 조선 말의 의병이었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적의 침략과 전쟁을 겪었으나 임진왜란 만큼 우리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 전쟁은 없었다. 유성룡의 징비록, 이순신의 난중일기, 이로의 용사일기, 오희문의 쇄미록 등 여러 기록과 서적들이 임진왜란의 비극적 상황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백성들의 역경을 잘 전하고 있다.
나라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지만 많은 관리가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왕실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왜군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한 관군은 연전연패해서 20일 만에 한양을 내주고 두달 만에 평양성마저 빼앗긴다. 궁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른 임금(선조)의 행렬은 우리나라 서북쪽 끝자락까지 이르렀으나 속수무책으로 오직 명나라 원군만 오기를 기다렸다.
이 때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농민에서 선비, 승려까지 농기구와 책, 목탁을 내려놓고 칼과 활을 잡은 것이다. 이들은 게릴라전을 통해 배후를 공격하거나 보급로를 끊었고, 관군과 합세해서 성을 탈환하는 등 왜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거칠 것이 없었던 왜군에게 의병이라는 큰 장애물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의 피와 땀으로 전국토가 잿더미가 되는 것을 면하고 무너져버린 관군을 재정비하고 명나라가 원군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벌수 있었다.
이처럼 일방적으로 불리하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던 것은 의병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이 이름 없는 선비, 농민, 승려들에 의해 살아난 것이다. 이 때 홍의장군 곽재우, 승려 휴정, 영규대사, 정인홍, 김덕령, 고경명, 조헌, 김천일, 박춘무 등 수많은 의병들의 활약과 이순신, 권율, 신립 장군 등의 항적(抗敵)이 컷으며, 특히 행주 산성 싸움에서 부녀자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랐고, 음식물을 군사에게 제공하였다. 이 때부터 부녀자들이 앞에 두르는 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병들의 희생과 성과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와 보상은 받지 못했다. 달아나기 바빳던 고관대작들은 지위와 부를 유지한 반면 왜적과 맞선 의병들은 목숨을 잃거나 집안이 몰락하기도 했다. 심지어 명망 있는 의병들은 임금과 관리들로부터 시기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름난 의병 장수들이 이런 대접을 받았는데 이름 없는 의병들의 상황이 오죽했으랴. 이런 이유로 정유재란 때 의병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데, 이는 의병들이 받은 홀대와 핍박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명나라 군대들의 일탈이 있었다. 고을 수령에게 곤장을 때리고 백성들 물품을 빼앗는 명나라 군사들의 횡포를 보면 ‘왜적이 끼친 피해는 얼레빗과 같고, 명나라 군사가 끼친 피해는 참빗 같다’처럼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떠돌던 말이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 1895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은 일본의 간섭에 의한 근대적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항하던 명성황후는 시해되었고 사회 경제적으로는 이미 일본에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조선을 구하고 옛 전통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유생들은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전기의 의병인 을미의병은 청일전쟁과 삼국간섭,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갑오개혁, 을미개혁, 고종 세력의 친미·친러 정책과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급진적 개혁 조치인 변복령과 단발령(斷髮令) 등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 사건이다.
일본군의 단계적인 침략에 항거한 의병 운동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문석봉, 정인회, 유언석, 노응규, 이소웅, 민용호, 김하락, 최문환, 기우만, 허위 등의 의병장이 있었다. 후기 정미의병은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 체결 및 통감부 설치, 고종퇴위와 군대 해산 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후기의 의병은 전기 농민군의 잔여 세력에다 군대 해산 후 근대식 무기를 지닌 해산 군인들의 참여로 항일 의병의 전력이 이전보다 강화되어 전투 수행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학덕을 갖춘 명망 있는 인사들이 앞장서서 창의하여 학연, 혈연 및 대가족 제도 등은 지역을 하나로 결속시켜주는 중요한 요이었고, 그 중심에는 재지사족이 의병 봉기의 구심세력 역할을 해주었다. 후기의 의병 운동을 대표하는 권용팔, 정운경, 이강년, 고광순, 김동신, 심남일, 안규홍, 기삼연, 채응언, 이범윤, 안중근, 신돌석, 유인석, 유홍석, 최익현, 김도현, 허위, 정환직, 정용기, 박기섭, 노용규, 민종식, 이인영, 노병대, 이은친, 김현준, 이소영, 한봉수, 차성충 의병장들이 있었다.
△의병들은 온갖 희생과 멸문지화를 당하면서도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투쟁하였으나 뚜렷한 성과도 거두지 못하며 일생을 보내었으나 제대로된 보상을 받지 못하였음은 물론 후손들도 구제받지 못하고 비참한 생활을 한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국가는 물론 우리들도 의로운 일을 하다 숨지거나 다친 의병들과 가족 그 후예들에 대한 처우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기고 정당한 대우는 못할지라도 마음속으로나마 고마움을 느끼는 삶을 살려고 하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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