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최다, 최소 그리고 유일. 숫자 ‘1’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팔십 해를 걷고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으며, 우리가 딛고 있는 경인 지역 바닥에 새겨진 1의 의미들을 찾아봤다. 가장 위대한 하나에서 가장 비천한 하나까지 명예롭거나 때로 수치스러웠던 ‘1’들 속에서 길러낸 이야기를 독자들께 소개한다.
[특별기획 ‘+1’]
조선은 수원 화성, 대한민국은 분당 조성
200년 시차 두고 빼닮은 두 계획도시
이주 갈등·직주근접·국가 주도 판박이
1969년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 인근 모습. /경기도청 제공
1997년 방화수류정 인근과 수원시내 모습. /경인일보DB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빌자면 수원 화성(華城)은 하루 아침에 이뤄졌다. 단 하루라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제국이 형성된 시간과 비하면 가히 하루라고 할만하다.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 화성은 1794년 1월에 착공해 1796년 9월에 완공됐다. 2년 8개월의 기간은 온갖 건축기술이 발달한 현대 신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비교해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다. 경기도 첫 신도시(1기 신도시) 대표주자인 성남 분당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분당은 1989년 4월 계획이 발표됐고, 1989년 11월 공사에 착수해 1996년 12월 사업이 끝났다. 7년 가량 걸린 것이다.
2017년 화성 행궁 성곽 모습. /경인일보DB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 화성과 경기도 첫 신도시들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점이 많다. 입지와 구획이 계획됐다는 당연한 부분부터 주거와 일을 조화시켜려 인프라 깔았다는 것, 무엇보다 그 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표준적인 삶, 이상적인 일상의 모습을 목표로 했다는 사실이 흡사하다.
실학자 유형원(1622~1673)이 명당으로 꼽은 수원 화성 일대는 농사 짓기에 토지가 부적합해 부락이 형성되지 않은 땅이었다. 분당동 외 8개 동으로 구성된 분당 신도시는 서울과 가깝다는 장점에도 1976년 시행된 ‘성남시 남단녹지 지역 건축제한’으로 개발이 불가능했다. 화성과 분당은 각각 토질개량과 개발허가를 통해 사람이 살만한 땅,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땅으로 변했다. 두 지역은 모두 국가 주도해 개발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수원 화성 축조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1801) 속 화성전도(華城全圖). 팔달산을 중심으로 마을을 품고 있는 옛 화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수원시 제공
정조의 계획도시 수원 화성
수원, 인구 50만 계획, 당시 한양의 2.5배
저수지 만들고 대규모 국영 농장 ‘대유둔’ 조성
상업 키우려 보조금 주고 인삼·갓 독점권 부여
인구 50만 도달, 200년 지난 1988년
수원시 팔달구 수원화성 성곽 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보이고 있다. /경인일보DB
수원시 팔달구 수원화성 성곽 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보이고 있다. /경인일보DB
조선 정조(1752~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현륭원에 모시면서,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옮겨 살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 수원 화성이다. 화성(華城)이란 명칭은 중국 요나라 임금의 ‘화봉삼축’(華封三祝)에서 따왔다. 부, 장수, 다자녀 세가지를 축원한다는 뜻인데 수원이란 신도시를 사람 살기 좋은 고을로 만들려고 했다는 의미가 이름에도 담겨 있다.
인접한 도시 화성시도 수원 화성에서 이름을 따왔다. 애초에 수원 화성이라는 명칭을 정조가 마음에 들어했던 이유가 아버지를 모신 현륭원 일대의 본래 명칭이자 조선 최고의 길지라는 ‘화산’(花山)과 음이 같다는 이유였으니 수원 화성과 화성시는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두 이름인 셈이다.
수원 화성과 현대 신도시의 빼박은 공통 분모는 의외의 곳에서 확인된다. 바로 ‘알박기’다. 택지개발이 예고되거나 예정된 땅에선 어김없이 알박기라 불리는 행위가 성행한다. 수용을 거부하거나 개발에 반대하며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거나 이주 자체를 거절하는 행동들이다. 수원 화성 개발과정에서도 알박기가 나타났으니 200년 시차를 두고 조선과 한국의 신도시들은 개발 과정에서 비슷한 진통을 겪은 꼴이다.
90년대 팔달산에서 바라본 수원시 전경. /경인일보DB
수원 화성으로의 이전이 결정됐지만 보상이 필요없다고 버텨 몇 배의 집값을 받아 나간 이의 기록이나 추가 보상비를 받아낸 양반의 사례가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게다가 공사를 완료하기로 한 9월이 다되었지만 도시 이전 업무를 맡은 수원부 관리와 소속 노비들이 공무가 바빴던 나머지 이사를 하지 못해, 차례로 쉬는 윤번제로 이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수원은 10만 가구, 인구 50만명의 도시로 계획됐다. 당시 수도 한양 인구가 20만명으로 추산되니 수도보다 훨씬 큰 도시를 꿈꿨던 것이다. 이만한 인구가 자리를 잡으려면 먹고 사는 문제,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직주근접이 필수다. 농업과 상업 두 가지 기간산업에서 수원은 처음부터 계획도시였다.
정조는 척박한 수원 땅에 퇴비를 뿌려 3년 만에 농사지을 수 있는 땅으로 바꿔 놓았고 1795년 두 달 만에 농업용 저수지인 만석거를 만들어 냈다. 둘레가 1천22보 가운데 수심은 11척(3m30cm)에 달하는 저수지였다.
정조의 제위 시기인 1795년 축조된 저수지 만석거. /경인일보 DB
만석거 주변으론 대규모 국영 농장 ‘대유둔’이 만들어졌다. 국영 농장에서 땅을 임대받은 농민들은 70%는 자신이 갖고 30%는 세금으로 납부했다. 농업 다음은 상업이었다. 상업이 융성한 개성, 평양, 의주 등의 상인들은 신도시 수원으로 내려오려 하지 않았다. 이 역시도 국가가 나서 해결했다. 정조는 집을 3천채 이상 구매할 수 있는 자금(당시 집 한 채에 15~20냥)인 6만5천냥을 보조금 삼아 장사를 원하는 수원 거주자에게 무이자로 대부했고, 이렇게 북수동 앞 종로 네거리에 팔부자거리가 조성됐다. 여기에 국가가 독점한 인삼 재배권과 갓 제조권도 수원 상인에게 부여하며 상업 진흥에 노력을 기울였다.
수원 화성은 전쟁이 나면 방어 용도로 구축하는 산성과 달리 읍성을 강화하는 형태, 즉 마을 주변에서 방어를 하는 형식으로 도시가 구성됐다. 튼튼하고 안전한 마을, 지금 말로하면 안보가 완비됐고 저수지와 둔전으로 농사하기 좋고 장사꾼이 모이게 만들어 도시를 구축했다. 입지, 조성, 도시화까지 국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다만 수원이 정조가 계획한 인구인 50만명에 도달한 것은 200년이 지난 1988년이 되어서였다. 이듬해 한국정부는 분당신도시 개발계획을 발표한다.
1기 신도시 대표주자 분당
분당, 조성 당시 토지주 절반 이상이 외지인
주택 공급 초점, 아파트 65% 임대·국민평형
유통·교통망 마련했지만 기업 유치는 간과
‘위성도시’ 한계… 2기 판교 개발로 보완
1991년 8월 26일 분당신도시 건설현장 사진. /KTV 제공
인구로보나 상징성으로보나 분당신도시는 1기 신도시의 대표주자라고 할만하다. 계획 수용인구 39만명의 분당은 일산(27만명), 중동·평촌·산본(16~17만명)을 너끈히 앞질러 계획 단계부터 대표 신도시로 꼽혔다.
분당은 서울 중심에서 2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접근성, 토지 소유주 50% 이상이 서울 주민 등 외지인이라 공영개발 진행이 수월하다는 점에서 적지였다. 위치 선정부터 조성은 청와대, 건설부, 대한주택공사·한국토지공사까지 수직으로 조직화된 국가가 전담했다. 조선은 화성을 한국은 분당을 건설했다.
수원 화성 조성 과정에서 이주가 쉽지 않았듯 분당 역시 1989년 7월 주민 1천400명이 건설부장관과 경기도지사 면담을 요구하며 집회를 여는 등 충돌이 있었다. 종국에는 이들도 시범단지 등 이주자 택지를 받아 도시에 안착했다.
1기 신도시 조성 당시 경기 성남 분당의 한 아파트 모습. /국가기록원
국가 주도의 신속한 개발이란 점에서 수원 화성과 공통점이 있는 분당은 일자리가 없다는 점에서는 차이점을 보인다. 분당은 계획당시 전체 아파트의 65.8%가 임대주택과 국민주택평형(전용면적 85㎡)으로 이루어질 만큼 빠른 주택공급에 초점을 맞췄다. 부담 없는 금액에 대규모 주택 단지를 짓는다는 목표였다. 당시 한국토지공사 본사를 분당에 둘 만큼, 상징성 있는 개발사업이었지만 서현역 중심의 쇼핑단지·탄천 개발·농수산물센터·경부고속도로 중심의 교통망까지 마련했을 뿐 기업 유치를 간과했다는 것이 옥의 티다.
편히 자고 먹고 쉬며 쉽게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도시라는 계획의 한계였다. 대체로 같은 기간 지어진 4곳의 신도시(일산·평촌·중동·산본)가 여전히 같은 문제에 매여 있는 것과 달리 분당은 그 과제를 해결했다. 2000년대에 이르러 직주근접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자, 강남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제2기 신도시 판교 개발로 보완한 것이다.
끊임 없이 변화하는 신도시
성남시 분당구 전경. /경인일보DB
성남 분당은 한국 신도시의 표준으로 여겨진다. 조 단위 매출을 올리는 거대 공룡 IT기업이 판교에 즐비해 높은 세수가 유입되며 30년 이상 뿌리 내린 공원, 하천녹지, 상가, 교통망 등의 인프라는 높은 도시 수준을 유지하게 해주는 기틀이다. 리모델링 열풍이 불고 있는 분당에선 국민평형에서 중대형 아파트로 탈바꿈이 한창이다. 서민 주거 안정에 목적을 둔 신도시는 한국 중산층 거주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수원 화성도 마찬가지다. 수원 도심은 이전·확장됐고 인구가 공동화된 화성 일대는 이제 MZ세대의 성지다. 농업용 저수지는 호수로 만석거 주변은 공원이 됐으며 수원은 상업 중심이 아니라 경기도 행정 중심지로 바뀌었다.
조선 계획 농업의 상징이었던 수원에 건국 후 농촌진흥청·서울대 농대가 자리 잡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허나 시간이 흘러 농촌진흥청은 국가기관 지방이전에 따라 전주로, 농대는 관악캠퍼스로 흡수됐고 그 자리엔 국립농업박물관이 들어섰다.
신도시도 신도시 자체로 머물지 않고 시대에 따라 변한다. 수원 화성도 변했고 분당 신도시도 변했다. 변하지 않는 건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만이 아닐까.
일과 주거가 조화를 이루며 사람과 사람이 소통할 수 있고 나아가 자신의 미래를 꿈꿀 수 있다면 국가가 개인에게 해줄 수 있는 이보다 좋은 지원은 없다. 1790년대나 1990년대나 지금이나 더 잘 살고자 하는 마음은 같은 것이다.
이 기사는 ‘분당신도시개발사’(한국토지공사),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김준혁 저, 여유당 펴냄) 문헌 참고했다.
/신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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