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전라 Insight] 혁명가 전봉준 “하늘 아래 모든사람은 존귀"

지금으로부터 132년 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전통사회에서 근대 시민사회로 전환되는 분수령이었다. 무지랭이 백성들이 역사의 주체로 떠올라 시민으로 성장하는 디딤돌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려 성장하는 자양분이 된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전라 Insight] 혁명가 전봉준 “하늘 아래 모든사람은 존귀"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사거리에 2018년 건립한 동상- 전봉준 장군은 혁명 이듬해인 1895년 4월 24일 이곳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진 제공

’난세에 영웅이 난다‘라는 말이 있다. 기존의 사회질서와 체제가 위기에 닥치고 이념이 무너지면서 새롭게 떠오르는 역사는 영웅을 부르는 법, 그 때가 바로 갑오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32년 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전통사회에서 근대 시민사회로 전환되는 분수령이었다. 무지랭이 백성들이 역사의 주체로 떠올라 시민으로 성장하는  디딤돌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려 성장하는 자양분이 된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그래서 1894년에 일어난 그 사건을 운동이 아닌 혁명이라 부르고 있으니, 그 중심에 바로 혁명가 전봉준이 있다.

전봉준 장군이 혁명당시 거주했던 집으로 알려진 정읍시 이평면 조소마을의 전봉준 장군 고택=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진 제공

전봉준은 1855년에 고창 당촌마을에서 태어나 13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고창을 떠나, 태인(현 정읍) 항새마을·지금실마을·전주 등지를 거쳐 드디어 1880년대 중엽 고부 조소리에 정착하여 서당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렸다. 1892년경에는 말목장터에도 약국과 서당을 열어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고 동학과도 인연을 맺었다.

전봉준은 10대부터 고부에 정착한 30대 중반까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조선의 현실을 목도하고 가난과 수탈과 질병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면서 그의 세계관을 형성하였으니, 어린 나이에 고창을 떠난 것이 오히려 혁명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삶은 1860년에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와 비교된다. 두 사람 모두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점, 가장 혈기왕성하고 꿈 많던 20대에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세상을 견문하고 민초들의 처참한 삶에 공감한 점, 보국안민을 위해 온몸을 바친 점, 똑같은 41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점 등은 공통점이다.

그러나 난세를 구하는 보국안민의 길은 달랐다. 수운은 수심정기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였다. 반면에 전봉준이 택한 보국안민의 길은 수운과는 달랐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쓴 절명시에서 자기 자신을 애인애국(愛人愛國)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듯이, 실제 전봉준의 삶과 사상은 보국안민의 정신을 구현하고 실천하기 위해 사회모순과 부조리에 직접 맞서 몸으로 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증명해보였다.

이렇게 전봉준이 실천적인 보국안민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사상적 바탕은 무엇보다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인본주의적 인간관에서 비롯되었다. 전봉준이 바라본 인간은 신분과 지위에 관계없는 보편적 인본 가치 위에 있는 수평적인 평등한 인간관이었다. 특히 전봉준 의식의 저변에는 하늘에 대한 영적인 경외감, 생태적 세계관, 인간에 대한 존엄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 때문에 전봉준이 바라본 사회는 평등하고 서로 돕는 상생의 공동체사회였다. 사회를 바라보는 전봉준의 따듯한 시선은 모든 민중을 향하고 있었다.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모든 사람을 대등하게 대하였으며 신분과 지위에 관계없이 공의를 기준으로 분별하고 사람의 생명과 목숨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전봉준이 마주한 현실은 불평등하였고 여러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로 민중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전봉준은 보국안민을 위한 정의로운 혁명의 길에 나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전봉준의 정치의식은 전통적인 근왕주의가 해체되고 민이 국왕을 직접 상대하는 수준까지 발전하는데, 그것은 민중들이 중세의 질곡에서 벗어나 국가의 주체인 국민으로 재구성되는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 중심의 전봉준 사상은 1894년 3월 20일 고창 무장에서 반포된 포고문에서 엿볼 수 있다. 포고문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김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로 시작,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유와 정당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하면서 보국안민을 목적으로 의로운 깃발을 들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무장 포고문의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사람 중심의 인본 가치와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보편적 가치로서 인륜을 지닌 인민은 모두 존귀한 존재인 것이다.

1895년 2월 27일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고 조선의 법무아문으로 이감될 때에 찍힌 사진-일본인 사진가 무라카미 덴신(村上天眞) 촬영=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진 제공

전봉준은 공주 충청감영 공격에 앞서 10월 16일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 첫 문장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사람은 기강이 있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다”로 시작하였다. 이것만 보아도 전봉준 사상의 출발점은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인본주의에 입각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전봉준의 인간 존엄의식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었다. 실천적인 것으로, 앎과 삶이 일치하였다. 전봉준은 재판을 받을 때, 재판관이 “너는 해를 입은 것이 없는데 왜 봉기하였느냐?”고 묻자, 전봉준은 “일신의 해를 위하여 봉기하는 것이 어찌 남자의 일이 되리요. 여러 사람이 원통하고 한탄하는 까닭으로 백성을 위하여 해를 제거하고자 함이었다”라고 하였다. 민중의 원통과 한탄에 공감하고 뜻을 같이 한 것이다. 그러기에 전봉준은 사형을 언도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전봉준이 택한 보국안민의 길은 죽음 속에서 피어난 산 역사였다. 그가 죽음을 앞둔 재판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전봉준의 따듯한 시선이 모든 민중을 향하고 있었기에, 보다 좋은 세상을 향한 의로운 죽음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난세가 낳은 혁명가 전봉준은 분명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존재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를 통해 되살아난 전봉준의 발걸음, 보국안민을 향한 그의 눈빛은 고창과 정읍, 전주, 서울 등 곳곳에 세워져 있는 그의 동상에서 마주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불멸, 바람길’은 혁명가 전봉준의 기상과 동학농민군의 꿈을 엿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조형물이다. 실제 녹두장군 전봉준이 앞장 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행군하는 모습은 친견하는 듯 살아있다. 전봉준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대역사는 머리가 아닌, 몸으로 마주해야 한다. 직접 걸어 역사 속으로 들어갈 때 진정한 공감과 공명이 일어나는 법, 병오년 봄날 그곳에 직접 가볼 일이다.

전라일보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