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무주는 하늘부터 다르다. 덕유산 능선 위로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고 아침 공기는 어느새 소매를 여미게 한다. 산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초록 잎 사이사이 붉은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것은 점이 아니라 탐스러운 사과다. 햇빛을 머금은 사과들이 가지마다 매달려 무주의 가을이 무르익었음을 조용히 알린다. 편집자
“사과는 밤공기를 먹고 붉어진다고 하잖아요.”
무주의 한 사과 농가는 새벽 과수원에서 사과를 살피며 이렇게 말한다. 전날 낮에는 따뜻한 햇볕이 과수원을 감쌌지만 밤이 되자 산에서 내려온 찬 기운이 밭을 지나갔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커질수록 사과는 천천히 색을 입고 단맛을 차곡차곡 쌓는다. 누군가에게 사과는 그저 과일 한 알이지만 농부에게는 봄부터 기다려 온 계절의 결실이다.
무주의 사과는 높은 산과 맑은 물, 선선한 기후가 함께 길러낸 가을의 맛이다. "하루 한 알의 사과는 의사를 멀리한다."는 영국 속담과 같이 무주 사과는 영양이 풍부하고 효능도 많은 과실이며, 칼륨, 칼슘, 나트륨 등 무기질의 함량이 높은 알칼리성 식품으로 식이 섬유소 및 비타민 C의 함량이 매우 높다. [네이버 지식백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꽃으로 시작한 붉은 약속
사과는 가을에만 등장하는 과일처럼 보이지만 농부의 시간은 봄부터 시작된다. 4월 무렵 과수원에 하얀 꽃이 피면 사과나무는 짧지만 눈부신 계절을 맞는다. 가지마다 피어난 꽃은 봄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과수원은 마치 흰 눈이 내려앉은 듯한 풍경을 만든다.
그러나 농부에게 꽃은 감상만으로 끝나는 장면이 아니다. 서리가 내리지는 않을지, 비가 너무 오래 이어지지는 않을지, 벌이 충분히 날아다니는지까지 살핀다. 꽃이 열매가 되고, 열매가 상품성 있는 사과로 자라기까지는 수많은 변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꽃이 지고 작은 열매가 맺히면 농부는 다시 선택의 시간을 맞는다. 한 가지에 너무 많은 열매가 달리면 사과는 작아지고 맛도 고르게 들기 어렵다. 그래서 아까운 마음을 누르고 일부 열매를 솎아낸다. 남은 사과에 햇빛과 양분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사과 농사는 욕심을 덜어내는 일입니다.”
농부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많이 달린다고 모두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 개의 사과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다른 열매를 내려놓는 일, 그 선택이 결국 소비자가 손에 쥐는 단단하고 맛있는 사과를 만든다.
-햇빛을 돌려주는 작은 손길
여름이 깊어지면 사과는 크기만큼이나 농부의 손길도 필요로 한다. 가지가 무겁게 처지지 않도록 받침을 세우고, 병해충을 살피고, 과수원 안쪽까지 바람이 잘 통하도록 가지를 정리한다. 사과가 붉게 익을 때쯤에는 나무 아래에 반사필름을 깔아 햇빛이 사과 아래쪽까지 닿도록 돕기도 한다.
누군가는 사과 한 알이 어떻게 그렇게 고르게 붉어지는지 궁금해한다. 답은 햇빛과 바람, 그리고 농부의 부지런함이다. 사과는 햇빛을 많이 받은 쪽부터 색을 낸다. 그래서 농부는 사과가 한쪽으로만 익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향을 돌려주기도 한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사과를 살며시 돌리듯, 나무에 달린 사과도 햇빛을 골고루 만나게 하는 것이다.
이 작은 손길은 결코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비가 많이 내린 뒤에는 습해를 걱정하고, 태풍 소식이 들리면 밤잠을 설친다. 수확을 앞둔 시기에 우박이라도 내리면 한 해 농사가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농부들은 일기예보를 누구보다 자주 확인한다. 휴대전화 속 기상 화면은 농가에게 또 하나의 농기구나 다름없다.
-‘딱’ 소리가 들리는 순간
사과를 고를 때 사람들은 빛깔과 크기를 먼저 본다. 하지만 무주 사과의 진짜 매력은 베어 물었을 때 느껴진다. 과육이 단단하게 부서지며 ‘딱’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고, 입안에는 맑은 단맛과 산뜻한 신맛이 함께 퍼진다. 단맛만 강한 과일이 쉽게 물릴 때도 있지만, 적당한 산미를 품은 사과는 한입 뒤에 또 한입을 부른다.
무주 사과는 차갑게 보관했다가 먹으면 더욱 아삭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 바쁜 아침에는 반으로 잘라 간단한 식사에 곁들이고, 아이들 간식으로는 한입 크기로 썰어 내놓으면 좋다. 얇게 썬 사과에 견과류와 요거트를 더하면 가벼운 한 끼가 되고, 오래 두어 식감이 부드러워진 사과는 조림이나 잼, 샐러드 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여행길의 사과는 특별하다. 덕유산의 단풍을 보고 내려오는 길, 또는 무주반딧불축제의 여운을 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과 한 상자를 싣는다. 차 안에서 하나를 꺼내어 한입 베어 물면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 퍼지고, 창밖의 산 풍경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때 사과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여행을 집까지 데려가는 방법이 된다.
-사과와 농부의 사계절
사과 상자 하나에는 가을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봄꽃을 지키기 위해 서리와 싸운 시간, 여름 햇볕 아래 땀을 닦으며 열매를 솎아낸 날들, 비바람이 몰아친 밤마다 과수원을 걱정한 마음, 새벽부터 수확한 사과를 조심스레 선별한 손길이 모두 담겨 있다.
수확철 과수원에서는 농부들의 손이 쉴 틈 없이 움직인다. 사과는 잡아당겨 따는 과일이 아니다. 가지를 상하게 하지 않도록 손목을 살짝 들어 올려 따야 한다. 수확한 사과는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기고, 다시 크기와 색, 흠집 여부에 따라 분류된다. 소비자가 받아 보는 깔끔한 사과 한 알 뒤에는 이렇게 섬세한 과정이 이어진다.
무주의 사과는 화려한 말보다 정직한 맛으로 기억되는 과일이다. 산간의 큰 일교차가 빚은 단단한 과육, 맑은 공기 속에서 익은 산뜻한 향, 농부가 계절마다 보탠 손길이 한 알 안에 들어 있다.
올 가을 무주를 찾는다면 과수원 가까이에서 잠시 걸음을 늦춰 보자. 초록 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붉은 사과는 마치 산골 마을이 건네는 작은 인사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아삭한 소리와 함께 무주의 가을이 입안에서 또렷하게 느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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