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학교 전경
과거 학교 전경
농업은 시대를 따라 변했다. 학교는 그 변화보다 한발 앞서 학생들을 준비시켰다. 1910년 문을 연 전주생명과학고는 116년 동안 전북 농업교육의 역사를 써 내려오며 2만 6026명의 졸업생을 길러냈다. 논과 밭에서 시작된 배움은 스마트팜과 식품, 반려동물, 도시조경 교육으로 확장됐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시대를 살아갈 기술을 가르친다'는 학교의 역할만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본보는 100년이 넘는 시간 위에 미래 농업을 심고 있는 전주생명과학고의 오늘을 들여다봤다.
스마트팜
교정에 들어서자 드넓은 논과 밭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았다. 여름 햇살을 머금은 작물들은 짙푸른 생기를 뽐내며 바람결에 일렁였다. 바로 옆 스마트온실에서는 촘촘히 설치된 각종 센서와 자동화 설비가 작물의 생육환경을 빈틈없이 관리하고 있었다.
흙냄새와 싱그러운 풀내음을 따라 교정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학교가 지나온 시간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한편에는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나선 학생들을 기리는 충혼탑과 개교 100주년 기념탑이 서 있고, 다른 한편에는 오래된 유리온실을 새롭게 단장한 학생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공간과 미래를 준비하는 배움터가 맞닿은 교정에는 116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함께 숨 쉬고 있었다.
1950년대 아침조회.
지난 1910년 문을 연 전주생명과학고는 전북 근대 농업교육의 시작을 함께한 학교다. 현재 재학생은 527명. 지금까지 2만 602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농업과 식품, 조경, 축산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한 졸업생들은 지역 산업 곳곳에서 전북 농업의 뿌리를 지탱해 왔다.
학교의 시간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곳은 역사관이다. 낡은 졸업장과 학적부, 교기, 교모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벽면에는 논에서 모내기를 하고 가축을 돌보는 학생들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지금 학생들은 논과 밭에서 농기계를 다루고 스마트팜 기술을 익히지만, 100여 년 전 학생들은 호미를 들고 논으로 향했다. 시대마다 사용하는 도구와 기술은 달라졌지만 '현장에서 익힌다'는 교육 방식만큼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1950년대 학생 실습사진
학교는 우리 현대사의 굴곡도 함께 견뎌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전장에 나섰다. 교정에 세워진 충혼탑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농업인을 길러내던 학교도 전쟁의 비극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전쟁 이후 학교는 전국을 대표하는 농업계 명문으로 성장했다. 학교사에 남아 있는 1940~50년대 한 운동회 사진에는 약 2200여 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넓은 실습장은 교실이자 농장이었다. 학생들은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며, 수확한 농산물을 가공하는 기술까지 익혔다. 농업이 국가 성장의 기반이던 시절, 이 학교는 전문 농업인을 길러내는 산실이었다.
오리농법을 활용한 친환경 벼 재배 실습
하지만 시대는 다시 변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은 빠르게 달라졌고 농업도 더 이상 흙만 다루는 산업이 아니게 됐다. 전주생명과학고 역시 과거의 명성에 머무르지 않았다. 스마트팜과 식품, 도시조경, 산림자원, 반려동물 분야까지 교육 영역을 넓히며 변화하는 산업에 맞춰 교육과정을 바꿔왔다.
학생들의 수업도 달라졌다. 이제는 센서로 온도와 습도를 관리하고 데이터를 분석해 작물의 생육환경을 설계한다. 하지만 기술이 첨단화됐다고 해서 흙을 떠난 것은 아니다. 학생들은 여전히 씨를 뿌리고, 작물을 키우고, 수확한 농산물을 직접 판매한다. 생산부터 유통까지 농업의 전 과정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실습은 예상하지 못한 학생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교실에서는 조용하던 한 학생이 농산물 판매 행사에서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손님을 응대하며 가장 많은 판매 실적을 올렸다. 시험지로는 보이지 않던 강점이 현장에서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 철학은 '가든카페 느티'에서도 이어진다. 철거를 앞뒀던 유리온실을 허물지 않고 학생들의 실습공간이자 쉼터로 다시 꾸몄다. 식품 분야 학생들은 직접 음료를 만들고, 학생들은 그곳에서 쉬고 이야기를 나눈다. 낡은 공간에 새로운 쓰임을 입힌 선택은 시대에 맞게 교육을 바꿔온 학교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교정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왔다. 논과 스마트온실은 서로 다른 시대의 풍경처럼 보였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호미는 센서로 바뀌었다. 논은 스마트온실로 확장됐다. 농업은 시대를 따라 끊임없이 변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스스로 살아갈 힘을 기르도록 돕는 학교의 철학만은 116년 동안 한 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규정 전주생명과학고 교장
<미니 인터뷰> 한규정 전주생명과학고 교장
한규정 전주생명과학고 교장은 학교의 역할을 '학생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학교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만 빛나는 곳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자신의 길을 찾는 곳이어야 한다"며 "학생 한 명 한 명의 강점을 끝까지 찾아주는 것이 학교와 교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한 교장은 교장실 문을 늘 열어두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학교생활이 힘든 학생이나 고민이 있는 학생들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며 "교장과 나눈 짧은 대화 하나가 학생에게는 오래 남는 기억이 될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학생의 고민을 이해하고 다시 힘을 낼 계기를 함께 찾을 수도 있다"고 했다.
또 학교가 학생들에게 기술보다 먼저 '자신감'을 심어주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한 교장은 "학생들이 '나도 할 수 있다'는 경험을 학교에서 한 번이라도 얻었으면 좋겠다"며 "학교에서 얻은 자신감은 졸업 후에도 어떤 일을 마주하든 스스로를 믿고 도전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116년의 전통에 대해서는 과거보다 미래를 이야기했다. 한규정 교장은 "역사는 자랑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학교의 미래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며 "앞으로도 시대 변화에 맞춰 학교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학생들이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을 이어가겠다"고 강조했다./조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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