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 그리고 타이밍’…기술 중심 경영의 전환 이뤄내
전자 R&D 투자와 화학 수직계열화로 오늘날 LG 양대 축 완성
고(故)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2012년 2월 충남 천안연암대학에서 열린 학위수여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구자경 회장은 LG그룹을 ‘창업기→ 산업화기→ 글로벌 전환기’로 도약시킨 핵심 인물이다. 그의 경영은 단순한 승계가 아니라, 산업 구조 자체를 재설계한 질적 도약의 과정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혁신’보다는 방향 설정, 산업 선택, 타이밍 판단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서 거의 실패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전략형 리더로 평가된다.
그는 전자와 화학을 양대 축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며 오늘날 LG의 구조를 만들었다. 무리한 확장 대신 핵심 산업에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LG를 단순 제조기업이 아닌 기술 기반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싸게 많이’에서 ‘비싸도 잘 팔리는’으로
구자경 회장은 선대의 조립·유통 중심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구∙개발(R&D) 투자를 대폭 확대하고 자체 기술 확보에 집중했다. 이는 당시 한국 기업 중에서도 가장 빠른 체질 전환이었다. 그 결과 LG는 ‘싸게 많이’ 생산하는 기업이 아니라 ‘품질로 신뢰를 확보하는’ 기업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략은 LG가 훗날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 잡는 결정적 기반이 됐다.
과거 금성사(GoldStar)는 LG전자로 재편되며 글로벌 시장으로 도약했다. 오늘날 LG전자는 프리미엄 가전 분야에서 세계 최상위권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평가된다. OLED TV, 프리미엄 냉장고, 세탁기 등 주요 제품군에서 글로벌 선도 지위를 확보했으며, 특히 OLED TV 부문에서는 확고한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경쟁력은 단순한 완제품 조립이 아니라 디스플레이, 모터, 컴프레서 등 핵심 부품의 내재화를 통해 확보한 것이다. 그 결과 LG전자는 ‘고장 없고 내구성이 강한 고급 가전’이라는 인식을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확립하며, ‘비싸도 신뢰받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다만 하드웨어 경쟁력에 비해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생태계는 약점으로 지적된다. 모바일 사업 철수 이후 AI·서비스 기반 연결성이 보완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구자경 회장 시기의 전략적 선택과는 무관한 후대의 과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생활화학에서 첨단소재까지 ‘산업의 ‘뿌리’를 장악하다
구자경 회장은 화학 사업의 체질 전환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생활용품 중심이던 ‘럭키’ 사업을 기초화학과 석유화학 중심으로 전환하며, LG화학의 성장 기반을 구축했다. 그의 전략은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라 산업의 근간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소비재는 한계가 있고, 산업의 뿌리는 소재”라는 인식 아래 원료부터 완제품까지 이어지는 수직계열화를 구축했다.
LG화학 구미 양극재 공장(LG-HY BCM) 전경. (사진=LG화학 제공)
석유→ 나프타→ 플라스틱→ 생활제품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원가 경쟁력과 공급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하며 외부 의존도를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생활화학에서 기초화학, 석유화학, 첨단소재로 이어지는 ‘계단형 성장 전략’으로 완성됐다. 이런 체질 전환은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과 맞물려 더욱 가속화했다. 정부의 인프라 및 금융 지원을 토대로 대규모 설비 투자가 이뤄졌고, LG는 자연스럽게 국가 대표 화학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구 회장이 석유화학을 ‘규모의 경제 산업’으로 인식하고 초기부터 대형 플랜트 투자에 나선 점은 후발주자 대비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조용한 실패’…무리하지 않는 경영의 또 다른 이름
구 회장의 경영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다만 그의 실패는 대규모 손실로 이어지는 ‘한 방의 실패’가 아니라, 타이밍 미스나 산업 선택 오류에 따른 ‘조용한 실패’에 가까웠다. 대표적으로 1970~1980년대 중공업 붐에 대응해 산업기계와 플랜트 등 일부 중공업 분야에 진출했으나, 경쟁력 부족으로 점진적 축소 후 철수했다.
또한 반도체 사업 역시 1970년대에 선제적으로 진입했지만, 투자와 집중의 한계로 결국 축소됐다가 LG반도체를 거쳐 SK하이닉스로 이어졌다. 자동차 및 부품 사업 역시 일부 시도가 있었으나 전략적 후퇴를 선택했다. 하지만 최근 LG전자 전장사업으로 재등장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이런 실패 사례들은 기회 상실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무리한 확장을 지양하고 리스크를 엄격히 관리한 결과이기도 하다. 잘못된 투자에서 신속히 철수하는 전략은 대규모 부실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했기 때문이다.
LG의 양대 축(전자∙화학)을 ‘설계’한 경영자
구자경 회장은 창업을 계승한 인물이 아니라, LG의 산업 구조를 설계한 경영자였다. 그의 선택이 없었다면 LG전자와 LG화학이라는 양대 축 역시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경영은 화려한 혁신보다는 방향성과 균형, 그리고 리스크 관리에 기반했다. 특히 ‘실패를 크게 만들지 않는 능력’은 LG가 장기간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으로 평가된다. 결국 구자경의 리더십은 기업을 키운 것이 아니라, 어떤 산업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설계한 데 있었다. 그리고 그 설계는 오늘날 LG가 단순 제조업체에서 글로벌 기술기업으로 자리 잡는 토대가 됐다.
이인형
은 가치공학(Value Engineering)분야 국제공인 CVS자격증을 보유한 프로젝트 컨설턴트다. 서울대 농학과를 거쳐 연세대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9년간 한국신용정보에서 기업 평가·금융VAN업무를 수행했고, 서울대 농생대 창업보육센터에서 3년간 보육매니저로 창업보육 업무를 했다. 현재 기후위기 대응 세계적 NGO인 푸른아시아 전문위원이며, 소비자 환경활동 보상과 개인신용정보 플랫폼도 준비 중이다. 금융‧산업‧환경‧농업 등이 주요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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