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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장경덕의 정글노믹스(220) 6대를 잇는 장인 정신 21세기에도 통할까?

천연 가죽 공급이 어려울수록 바이오 테크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다. 에르메스는 2021년 버섯 균사체로 만든 가죽(실바니아)으로 가방을 제작했다. 하지만 생산은 소량에 그쳤고 내구성이 중요한 가방끈은 여전히...

장경덕의 정글노믹스(220) 6대를 잇는 장인 정신 21세기에도 통할까?

장경덕 작가·번역가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는 프랑스 기병대를 위해 가죽과 마구를 조달하려고 미국에 갔다. ‘모델 T’로 미국 자동차 시장을 휩쓸던 헨리 포드도 만났다. 자동차가 급속히 말을 대체하던 시대에 3대째 마구 제작 가업을 잇던 에르메스가 자동차 왕을 대면한 것이다. 그는 포드의 권유로 혁신적인 대량 조립 생산 (컨베이어 벨트) 체제를 둘러보고 충격을 받았다.

캐나다에 가서는 눈이 번쩍 뜨였다. 군용차 후드를 빨리 여닫을 수 있게 고안한 ‘클로즈올(close-all)’ 개폐 시스템을 본 것이다. 그가 처음 본 지퍼였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프랑스 내 지퍼(처음에는 ‘에르메스 잠금장치’라고 불렀다) 독점 사용권을 따냈다. 1918년에는 훗날 영국 에드워드 8세가 되는 웨일스 공의 가죽 재킷에 지퍼를 썼다. 의상에 지퍼를 도입한 것은 혁신적이었다. 코코 샤넬도 에르메스에 장인들을 보내 지퍼 사용법을 배우게 했다.

1923년에는 세계 최초로 지퍼를 단 자동차용 가방을 내놓았다. ‘볼리드’ 가방의 전신이었다. 확실히 지퍼는 에르메스의 역사를 바꾼 대혁신이었다. 지퍼를 달면 가방을 빈틈없이 닫아서 물건이 쏟아지지 않았다. 한 손으로도 빠르게 여닫을 수 있고 간결한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었다.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중상류층의 여행 수요와 더불어 가방 판매도 급증했다.

말과 마부, 마차가 그려진 로고는 에르메스의 역사를 말해준다. 창업자 티에리 에르메스는 1837년 파리에서 자기 이름을 딴 공방을 열었다. 가죽과 철로 마구를 만들었는데 내구성이 뛰어난 안장이 인기였다. 제작법이 특이했다. 밀랍을 바른 실 양 끝의 두 개의 바늘로 꿰매는 ‘새들 스티치’ 방식은 한두 바늘땀이 끊어져도 쓰는 데 문제가 없었다.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메달을 딸 만큼 그의 장인 정신은 높이 평가받았다.

1878년 가업을 이은 샤를 에밀 에르메스는 수선 서비스로 큰 호응을 얻었다. 에르메스는 러시아, 미국, 아시아에도 알려졌다. 그의 아들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는 자동차 시대에 발맞춰 마구 대신 여행 가방과 의류, 핸드백으로 과감하게 사업 영역을 옮겨갔다. 그에게는 딸만 넷이 있었다. 1951년 가업을 이은 4세대는 둘째 사위 로베르 뒤마였다.

1956년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가 임신한 배를 가릴 때 써서 ‘켈리 백’으로 불리게 된 가방의 모태는 뒤마가 디자인한 서류 가방으로 1935년에 처음 나왔다. 실크 스카프 ‘까레’도 그의 지휘 아래 나왔다. 뒤마의 아들로 1978년 5세대를 연 장 루이 뒤마는 에르메스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장 루이가 파리행 기내에서 영국 배우 겸 가수 제인 버킨과 우연히 만났을 때 스케치한 가방이 1984년 우아하면서도 넉넉한 ‘버킨백’으로 나온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성장 가도를 달린 에르메스는 1993년 주식을 상장했다. 전체 주식의 19.3%를 팔았는데 청약 경쟁률이 34대 1이었다. 장 루이의 아들 피에르 알렉시 뒤마는 2005년 아티스틱 디렉터가 됐다. 회장 자리는 잠시 전문경영인이 맡았다가 LVMH의 지분 매집으로 비상이 걸린 2010년부터 장 루이의 조카 악셀 뒤마(피에르 알렉시의 사촌)에게 넘겨줬다.

6대째 이어온 장인 정신은 189년의 전통을 간직한 이 럭셔리 제국의 저력이다. 하지만 말 안장을 만들던 에르메스가 지퍼 달린 가방 제조업체로 변신했듯이 이제 또다시 대변신을 준비해야 할 때다. 한 세기 전에는 같은 가죽으로 무엇을 만들지를 고민했다면 앞으로는 가죽의 정의 자체를 바꿔야 할 수도 있다.

2015년 제인 버킨은 잔혹한 악어 도살에 정당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버킨백에서 자기 이름을 빼라고 요구했다. 동물권뿐만 아니라 환경과 지속가능성을 위한 감시의 눈초리도 매서워질 것이다. 천연 가죽 공급이 어려울수록 바이오 테크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다. 에르메스는 2021년 버섯 균사체로 만든 가죽(실바니아)으로 가방을 제작했다. 하지만 생산은 소량에 그쳤고 내구성이 중요한 가방끈은 여전히 송아지 가죽이었다.

에르메스는 여전히 컨베이어 벨트식 분업을 거부한다. 한 명의 장인이 가방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만드는 방식을 고수한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로봇, 3D 프린팅의 시대에도 가죽과 대화하는 경지에 이른 장인의 손맛은 더 비싼 값에 팔릴 수 있다. 하지만 품질 좋고 값싼 대체재의 위협은 갈수록 커질 것이다. 체스와 바둑판을 평정한 인공지능이 명품 공방은 언제까지나 넘보지 않고 내버려 둘까?

장경덕 작가·번역가

33년간 저널리스트로서 경제와 기업을 탐사했다. 『부의 빅뱅』 『애덤 스미스 함께 읽기』 『정글 경제 특강』 등을 썼고 『보수주의』 『21세기 자본』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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