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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일본화 교육 안 된다" 독립·자존 일깨운 경남 교사들

올해 8.15 광복 81주년을 맞습니다. 일제에 맞서 싸우고도 아직 이름을 찾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경남도는 공적 입증자료 부족 등으로 서훈을 받지 못한 지역 인사 36명을 발굴해 지난 6월 국가보훈부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습니다.

"일본화 교육 안 된다" 독립·자존 일깨운 경남 교사들

■ 광복 81주년, 경남의 숨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3) 교단서 피어난 민족 정신

일제 학교·교육행정 장악 조선어·역사교육 억압

1933년 공립보통학교 교사들 비밀결사 조직

의무교육 도입·일어 상용 반대 등 35개 행동강령

일제에 발각돼 30여 명 체포·조사…회원들 징역형

“식민지 교육 맞서 조선인 학생 교육권 확대 꾀해”

올해 8.15 광복 81주년을 맞습니다. 일제에 맞서 싸우고도 아직 이름을 찾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경남도는 공적 입증자료 부족 등으로 서훈을 받지 못한 지역 인사 36명을 발굴해 지난 6월 국가보훈부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습니다. 일제 경제적 수탈에 항거한 농·어민 20명과 제국주의 교육에 맞선 공립학교 교사 5명 등이 포함됐습니다. 광복절을 맞아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이들의 행적을 조명합니다.

일제는 교육을 식민지배 수단으로 삼았다. 학교와 교육을 장악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억누르고 일본 제국에 순응하는 신민을 길러내려 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도 저항은 이어졌다. 교사들은 우리말과 민족의식을 지키며 식민지 교육에 맞섰다. 학생들에게 독립과 자존을 일깨우는 것도 항일운동이었다. 1933년 경남지역 교원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교육노동자협의회’도 그 한가운데 있었다.

교육노동자협의회 사건에 연루된 황보현의 선생 당시 판결문 원문. /경남도

교단까지 파고든 식민지배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제도와 행정을 개선한다는 ‘시정 개선’을 명분으로 교육에 개입했다. 학부에 ‘학정 참여관’제를 신설해 교육 행정과 학교 운영을 통제할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한국 교육 개량안’을 통해 일본어 보급과 학제 개편, 일본에 순응하는 인력 양성을 추진했다.

통감부는 1906년 학교령 개정으로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바꾸고 수업 연한을 4년으로 정했다. 일본어를 필수 과목으로 편제하고 일본인 교사를 학교에 배치해 수업과 운영에 관여하도록 했다.

사립학교와 서당도 통제했다. 통감부는 보조금과 재정을 앞세워 사립학교 운영에 개입하고 일본인 교감을 파견했다. 1908년 ‘사립학교령’ 등을 통해 사립학교 설립과 운영을 통제하고 일부 학교를 폐쇄하거나 공립학교로 전환했다. 서당에도 보통학교 입학을 유도하고 일본어와 산술 등 신교육을 확대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교육 통제는 더욱 체계화됐다.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은 ‘충량한 국민’ 육성과 ‘시세와 민도에 적합한 교육’을 내세웠다. 조선인에게는 일본인보다 짧은 교육과정이 적용됐고 고등교육 기회도 제한됐다.

교육과정도 식민통치에 맞게 개편됐다. 일본어를 ‘국어’, 한국어를 ‘조선어’로 규정하고 일본어 수업은 늘린 반면 조선어 수업은 줄였다. 한국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독립 교과는 두지 않고 일본 중심의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이후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도 식민지 교육의 기본 틀은 유지됐다. 1938년 제3차에서는 황국 신민화 교육을 강화했고, 1943년 제4차에서는 전시 동원과 군국주의 교육을 더욱 강화했다.

1933년 경남지역 교육노동자협의회 사건을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 /경남도

비밀리에 뭉친 경남교원들

일제가 교단까지 장악했지만 모든 교사가 식민지 교육에 순응한 것은 아니었다. 경남지역 공립보통학교 교원들은 식민지 교육에 맞서 민족교육을 추진하기 위해 비밀결사 ‘교육노동자협의회’를 조직했다.

교육노동자협의회는 1933년 경남지역 공립보통학교에 재직하던 훈도들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부산진공립보통학교 이화준, 이명상, 최명석, 정두명, 강용운 선생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식민지 교육과 조선인 교원에 대한 차별에 문제의식을 갖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교육을 추진하고자 했다. 경남 각 지역 교원들은 여러 차례 비밀회의를 열어 조직의 목적과 활동 방향을 논의했다.

1933년 3월 28일 교원들은 마산 앞바다에 배를 띄우고 강령과 행동방침을 논의했다. 중앙부 책임과 재정·조직부원을 선출하고 경남을 중부·동부·서부로 나눠 책임자를 두는 조직체계도 마련했다.

이튿날인 3월 29일 교육노동자협의회가 정식 출범했다. 협의회는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 획득, 제국주의 교육 반대, 한국인 중심 교육 등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행동강령도 35개 항에 달했다. 한국인과 일본인 교원의 임금 차별 철폐, 의무교육제도 도입, 반전사상 교육, 교내 일본어 상용 반대 등이 대표적이다.

교원 처우 개선을 넘어 조선인 학생들의 교육권을 확대하고, 일본 중심의 식민지 교육에 맞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려는 요구였다. 교원들은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4일 조직이 일제에 발각되면서 30여 명이 체포·조사를 받았다. 이 가운데 21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1934년 7월 5일 부산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위반 등 혐의로 회원들에게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 등을 선고했다.

이 가운데 7명은 1990~2000년대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사건에 참여하고도 아직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 남아 있다.

교육노동자협의회 관련 활동 내용이 기록된 ‘고등경찰관계적록’ 원문. /경남도

“학생들에게 독립·자존 심어”

일제는 이들의 활동을 불온사상으로 규정하고 치안유지법·보안법 등을 적용해 탄압했다. 그러나 학계는 교육 현장의 차별 철폐와 민족교육을 내세운 교사들의 항일운동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1920년대 경남동부지역 청년운동’ 등 일제하 청년·민족운동을 연구한 김승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는 당시 사회주의 계열 운동을 광복 이후 이념 구도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의 독립이었고,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이 다양했던 것”이라며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하나만 가지고 한국전쟁과 분단 이후 사고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큰 역사적 틀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은 사회주의 계열 운동을 천황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봤고, 어떻게 해서든 치안유지법을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조선의 독립이 정당하다는 것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다는 측면에서 교원들의 활동은 다른 독립운동과 비교해도 그 격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전성현 동아대 사학과 교수는 “당시 조선인들은 교육열이 높았지만 학교 자체가 부족했고, 학교 안에서도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 차별이 계속됐다”며 “교장급도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일본인 중심 교육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남 교육노동자협의회는 이런 교육 불평등에 직접 문제를 제기하려 한 비밀결사 조직”이라며 “학생들의 교육 기회에 대한 평등과 학교 안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 철폐를 강하게 요구하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경남 교육노동자협의회는 제국주의에 순응하는 교육, 일본화되는 교육에 대한 반발이었다”며 “교육 현장 불평등을 바꾸려 했던 교원들의 항일운동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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