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일상화된 이후 대학은 그야말로 대혼란을 겪고 있다. 사용 지침을 마련하려는 시도가 활발하지만,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에 올라타 교통법규를 쓰는 모양새다. 도로가 어디로 얼마나 뻗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학생들이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방식이 점점 ‘인공지능화’되어 가는 것은 그저 기우가 아니다. 텍스트와의 만남이 단순히 정보를 추출하는 작업으로 환원되니 행간을 읽는 ‘발견’으로서의 독서가 사라진다. 키보드만 누르면 되는 즉각적인 결과에 익숙해지니 질문에 머무는 힘 역시 쇠퇴한다. 말과 글에 드러나기 마련인 저마다의 인장, 울퉁불퉁한 삶의 결을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안전하고 매끄러운 것, 즉 인공지능의 스타일이 ‘적절한 것’으로 간주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조차, 청년 학생들에 따르면, 그들이 처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물정 모르는 소리다.
청년들에게 인공지능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2025년 하버드 케네디스쿨 정치학연구소(Harvard Kennedy School Institute of Politics)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대학생의 약 70퍼센트가 인공지능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한다. 안정적인 직업군으로 분류되던 영역마저 속속들이 자동화되고 있다. 입학하자마자 직업 상담을 받아야 하고, 꿈을 품고 선택한 전공을 제대로 배워 보기도 전에 포기해야 한다.
인공지능은 이렇듯 모든 청년의 앞날을 위태롭게 만들지만, 각자의 출발선에 따라 계층 간 차별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자산가와 전문직 가정의 청년들은 월 수십만 원짜리 프리미엄 AI를 몇 개씩 사용하며 테크 엘리트로 성장한다. 그 대가로 이들은 시스템의 속도에 자신을 소모 시키는 최적화된 부품이 되어가고 있다. 사무직과 전문직을 지망하는 평범한 대학생들에게 AI는 능력의 끝을 알 수 없는 무서운 동료이자 경쟁자다. 이들은 AI로 지원 서류를 쓰지만 정작 서류를 받을 회사가 AI 때문에 신입을 뽑지 않는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서비스, 물류, 돌봄 노동을 하는 중하층 청년들은 배차와 동선, 통화의 말 한마디까지 AI의 관리와 평가를 받는다. 자율성과 창의성은 살아남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AI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농어촌, 이주 배경 청년들은 어떨까. AI는 이들을 이름 대신 복지 자격과 신용 점수, 임대주택 순위의 수치로 기억하고 그에 따라 이들의 삶을 결정한다. AI와 가까워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지만,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살아남을 기회를 뺏기는 이 모순을 청년들은 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인공지능과 사람 (사진 출처 = Unsplash, Igor Omilaev)
나는 매 학기 첫 수업을 인공지능 사용을 둘러싼 토론에 할애한다. 거듭 확인하는 것은 학생들은 인공지능 사용이 가져올 문제점을 충분히 자각하고 식별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대학 내에 AI 프리 공간을 만들고, 느리게 읽고 쓰는 동아리들을 꾸리기도 한다. 그러나 학기 말이 다가오고 과제물이 밀리면 결국 AI를 사용한다. 취업으로 이어지는 학점 평가의 기준과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학생들의 분별은 개인적인 자각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부족한 것은 분별력이 아니라 그 분별을 실제 선택으로 옮길 수 있는 구조다. 교수마다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도와 윤리적 기준이 다른 것도 큰 문제다. 많은 교수가 AI에 대해 배우려 하지 않으며, 변화한 현실을 외면한 채 이전의 기준으로 학생들을 평가한다. 교수와 학생 사이의 간극은 대학을 감시와 통제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AI를 완전히 금지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교만하다. 그렇다고 AI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도록 격려하는 것 또한 적어도 인문학의 분야에서는 직무 유기다. 인공지능 사용을 위한 교회의 지침, <옛것과 새것 (Antiqua et Nova)>이 언급하듯, 학생들이 “독자적인 수행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머리의 언어”가 “마음의 언어”, “손의 언어”와 조화롭게 성장하도록, 그리하여 AI를 활용하되 그에 종속되지 않도록 돕는 것이 시급하다 (81항).
이러한 혼란의 와중, 전면 금지와 적극적 활용 사이에서 고민하는 교육자들은 인공지능과 차별되는 인간의 ‘고유함’을 강조한다. 머뭇거림과 침묵, 어긋남과 더듬거림, 마주치는 눈과 웃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인간의 취약함은, 물론 아직 인공지능이 모방할 수 없는 ‘인간다움’이겠다. 나도 학생들과 마주할 때는 종종 이런 언어를 빌리지만, 마음이 복잡하다. 취약함이 과연 인간의 고유성을 지켜 줄 보루일까? 얼마 전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 벗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함께 했던 선생님이 본인의 직장에 다니는 20·30대에게 “급여가 높지만 의미 없는 직업과, 급여는 적어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직업 중 무엇을 택하겠는가”라고 물었다 한다. 응답자 전원이 전자를 택했단다. 이 결과를 의미에 무관심한 세대의 증거로 읽는 것은 게으른 독해다. 노력과 보상의 순환이 끊긴 시대의 청년들은 이제 직장을 통해 의미를 찾는 대신 여행, 예술, 취미, 영성을 추구하며 의미를 찾는다. 효율의 영역과 비효율의 영역이 분리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벌어들인 자원을 통해 비효율을 구매하는 방식이 자리 잡은 것이다. 효율과 비효율이 이렇게 분리되는 순간, 우리가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부르는 것들도 결국 소비사회의 메커니즘에 흡수된다. 취약함을 짜내고 가공하여 유통하는 시장이 형성된다는 말이다. 돈을 들여 소위 ‘오지’ 체험을 하는 것처럼, ‘인간다움’이란 ‘오지’를 체험하는 것이다.
테크놀로지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인간의 취약함을 경쟁력으로 내세우는 접근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 취약함이 ‘얼마나 위대한가’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이다. 머뭇거림과 침묵, 어긋남과 더듬거림, 마주치는 눈과 웃음은 효율의 시대가 미처 지우지 못한 인간의 표지인 동시에 사람의 ‘곁’을 청하는 부름이다. 그 부름은 응답할 사람이 있을 때는 공감과 낭만이 될 수 있지만, 응답할 사람이 없을 땐 고립과 외면의 자리로 침몰한다. AI는 바로 그 자리에서 청년에게 ‘응답’이 아닌 ‘답’을 제공한다. 학생이 AI를 이용해 읽고 생각하고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난한 사유의 과정을 함께 고민해 줄 교수와 그 노고를 인정해 줄 시스템의 응답이 없기 때문이다. ‘삼포,’ ‘사포’시대, 청년이 친밀성을 포기하며 AI 연인과 AI 상담사에 올인하는 이유는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요청에 응답이 없기 때문이다. AI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우리는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흙을 담은 손 (사진 출처 = Pixabay, Vilius Kukanauskas)
효율지상주의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공간, 돌봄과 신뢰의 두께, 공공의 책임을 침식하며 만들어 낸 바로 그 자리에 인공지능이 들어서 있다. 세상은 이제 AI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기획되어 간다. 인간의 무관심과 무책임을 드러내는 ‘현상’이었던 AI가 이제 점점 ‘본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인간의 손길을 허락하는 협소한 틈새에 어색하게 끼어 앉아, 인간은 스스로 만든 그림자가 자신을 흉내 내다 끝내 삼키도록 쉼 없이 작동 키를 누르는 중이다. 그 최전방에 청년이 내몰려 있다.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루라도 더 빨리 AI에 올인해 모두를 밀치고 혼자 살아 남아야 한다고 가르칠 것인가, 혹은 인간의 취약함을 상품화하여 얄팍한 위로를 제공하는 데 머물 것인가? 그 위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는 그리스도교 영성이 맨 먼저 찾아야 할 응답의 자리는 오히려 인공지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가난한 이들의 자리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돌봄과 구제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가난한 이들의 현재가 인공지능이 만들어낼 청년 대부분의 미래를 앞당겨 보여주기 때문이다. 교종 레오 14세는 첫 번째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t Te)>에서 “’우리 모두가 가난한 이들에 의해 복음화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102항). 가난한 이들에게 시혜를 베풀어 영적 위안을 얻으라는 권고가 아니다. 가난을 낭만화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가난에 낭만은 없다. 가난은 하느님께서 결코 의도하지 않으신 구조적 폭력이다.
교종은 AI에 의해 피폐해질, 가난의 미래를 살게 될 청년들을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호소하고 있다. “극심한 불안정 속에서 자라나고,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며, 아무도 자신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하느님께 의탁하고, 가장 어두운 순간에 서로 돕는 가난한 이들”(102항)의 얼굴이 AI가 보여주는 가상현실 대신 청년의 눈에,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선 교회부터 AI 인터페이스를 넘어 가난한 이들의 자리로 향해야 한다. 그들이 먼저 경험한 파국을, 그 파국 속에서 여전히 길어 내고 있는 삶의 지혜와 연대의 신비를 증언하며, 그 자리에서 들려오는 시대의 복음을 청년들에게 선포해야 한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그 자리가 교회를 통해 드러나도록, 그리하여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는 가난한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조민아
신학자.
조지타운 대학교 신학과 종교학부 교수(The Department of Theology and Religious Studies, Georgetown University, Washington DC,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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