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은 총재 4년 마침표…험로 속 통화정책 이끌어 [MTN금융+]
전쟁·금융불안에 계엄·관세충격까지…격랑 속 4년
사상 첫 빅스텝으로 물가 잡았지만 환율·구조개혁 숙제
"금리만으론 안 된다"…서학개미 논란부터 AI 리스크까지 마지막 경고
송요섭
기자
2026-04-20 12:56:41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0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이임사를 하고 있다. / 제공=뉴스1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4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 2022년 4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발 인플레이션 충격 속에 취임해 부동산 금융 불안,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수도권 집값 상승과 가계부채 증가, 비상계엄 사태, 미국 관세정책 변화, 중동 전쟁에 따른 환율 급등까지 잇따른 충격을 겪으면서도 물가 안정에 성공했다. 녹록지 않은 여건에서 통화정책을 끌고 왔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다만 환율 불안과 구조개혁, 금리정책의 한계라는 숙제는 끝내 풀지 못한 채 후임에게 넘기고 떠나게 됐다.
20일 이 총재는 서울 중구 한은 본관 1층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지난 4년에 대해 "우리가 예상했던 범위 안에서의 시간이 아니라 그 경계를 끊임없이 넘어야 했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취임 직후 전 세계 물가가 치솟자 한은은 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 빅스텝을 밟으며 기준금리를 3.5%까지 끌어올렸다.
이 총재는 임기 성과로 먼저 물가 안정을 들었다. 그는 "높아진 인플레이션을 금리정책을 통해 주요 중앙은행보다 먼저 2%대 목표 수준으로 되돌린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형 포워드 가이던스를 도입해 시장과의 소통 방식을 바꿨고 스무 편이 넘는 구조개혁 보고서를 내놓으며 정책 자문 기능도 강화했다"고 자평했다.
가계부채 비율을 하락세로 돌린 점과 국제적 위상 강화도 성과로 꼽았다. 이 총재는 지난 20여 년간 상승하기만 했던 가계부채 비율을 처음으로 낮췄다고 했고 비기축통화국 중앙은행 총재로는 처음으로 국제결제은행(BIS) 글로벌금융시스템위원회(CGFS) 의장을 맡은 점도 의미 있는 결과라고 했다.
하지만 이날 총재가 더 길게 말한 것은 성과보다 한계였다. 그는 "통화·재정정책만으로 우리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이루어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다. 경제구조 변화로 정책의 효력이 약해졌는데도 정책당국에 대한 국민 기대는 여전히 높아 양자 간 괴리가 커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외환시장에 대한 인식 변화도 다시 강조했다. 과거처럼 외국인 자금 흐름만 보던 시대가 아니라 국내 기업, 개인, 국민연금 등 거주자의 영향이 커진 만큼 제도 개선 없이 예전처럼 외환시장 개입이나 금리정책만으로 환율을 관리하려 하면 더 큰 부작용이 날 수 있다고 했다. 사실상 중앙은행이 금리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 커졌다는 뜻이다.
저출생과 저성장, 산업 양극화 문제를 두고도 같은 말을 했다. 통화·재정 같은 단기 처방으로는 풀 수 없고 노동·교육 등 구조개혁을 통해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호황 덕에 경기와 외환시장이 일정 부분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점은 다행이지만 특정 산업 의존과 양극화라는 구조적 문제는 더 깊어지고 있다고도 했다.
이임식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특유의 농담도 나왔다. 자신의 임기를 학점으로 매겨 달라는 질문이 나오자 그는 "성적 하나로 평가하기는 그렇다"고 했다. 이어 "예전부터 성적만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데 비판적이었다"며 "그래서 학교에도 안 가려고 한다. 강의는 해도 성적을 매겨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 능력과 한계 안에서 나라 전체를 생각해 정책을 했다"고 했다.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으로는 비상계엄 직후 외신 대응을 꼽았다. 헌정 질서가 작동하면 경제와 정치는 분리될 수 있다는 메시지로 해외 시장을 설득했던 때라고 했다.
이 총재는 '서학개미' 발언 후폭풍도 돌아봤다. 지금 다시 하라면 그 표현은 안 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국인 해외투자가 환율에 영향을 줬다는 판단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욕은 먹었지만 그 뒤 국민연금 해외투자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고 제도 개선을 이끌었단 설명이다.
금리 판단을 둘러싼 소회도 밝혔다. "한은이 딜레마에 빠졌다"는 평가에 대해선 "그 문장 되게 싫어한다"고 했다. 금리를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한 것이 아니라, 금리를 움직이지 않는 것 자체가 당시엔 중요한 정책 결정이었다는 취지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물가가 2%대로 내려왔는데도 왜 금리를 내리지 않느냐는 비판이 거셌던 때를 들었다. 당시엔 금리를 안 내린다고 욕을 먹었고 지금은 반대로 금리를 낮게 가져가 환율과 부동산을 자극했다는 비판을 받는다며 "양쪽으로 비난받는 걸 보니 중간은 했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이 총재는 "아직 중동전쟁이 끝나지 않아 외환·금융시장이 충분히 안정되지 못한 채 자리를 넘기게 돼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후임인 신현송 후보자에 대해서는 "저보다 훨씬 훌륭하신 분"이라며 말을 아꼈다. 직원들에게는 목표를 높게 잡으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무관심보다는 악플이 낫다"고 했다. 시끄럽더라도 한국은행이 시장과 국민 앞에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단 취지다.
마지막으로 고성능 AI가 촉발할 사이버 보안 리스크를 경고했다. 그는 퇴임 직전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와 IMF·세계은행그룹 춘계회의에서 가장 많이 들은 화두로 중동 사태와 함께 AI와 사이버 시큐리티를 들었다고 했다. 이 총재는 "고성능 AI가 해킹에 악용될 경우 은행과 결제망, 금융 인프라의 약한 고리를 먼저 흔들 수 있다"며 "해킹이 현실화할 경우 가장 약한 고리가 미국이 아니라 연결된 다른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송요섭 머니투데이방송 MT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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