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정부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성한 '기후대응기금'이 규모는 물론 사업 내용 면에서도 탄소중립 목표와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기금 총량이 해마다 쪼그라드는 가운데 정작 지원 사업을 들여다보면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 유지보수, 음식물쓰레기 처리기 보조금 등 기존 환경관리 사업을 이름만 바꿔 옮겨놓은 것이 대부분이라는 지적이다.
지자체 기후대응기금이 규모는 줄어들고 사업 내용도 탄소중립 목표와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제기됐다.(사진 클립아트코리아)/뉴스펭귄
녹색전환연구소가 19일 서울·경기·부산·전북·전남 등 5개 광역지자체 기후대응기금을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연구소가 이날 공개한 보고서 ‘지역 기후대응기금의 현황과 발전 방향’에 따르면 기금의 실제 규모가 탄소중립 목표를 뒷받침하기에 부족하고 운용 액수도 쪼그라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탄소중립기본법 시행 이후 서울·경기·부산·전북·전남·세종 등 6개 광역지자체와 12개 기초지자체가 자체 조례를 통해 기후대응기금을 설립했다. 이 기금들은 온실가스 감축, 재생에너지 보급, 기후테크 기업 육성, 정의로운 전환 지원 등에 활용하도록 설계됐다.
보고서는 기금의 실제 규모가 탄소중립 목표를 뒷받침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공개된 내용을 보면 5개 광역지자체 기금이 각 지자체 전체 기금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07~2.1%에 불과하다. 서울시 기후대응기금 지출액은 2024년 501억 원에서 2025년 314억 원, 2026년 296억 원으로 3년 연속 줄었다. 경기도는 기금 출범 첫해인 2024년 240억 원에서 올해 118억 원으로 반토막 났다. 부산(48억→41억)과 전북(12억→7억5000만)도 나란히 줄었다. 전남만이 1억 원에서 4억3000만 원으로 늘었다.
이처럼 기금이 쪼그라드는 근본 원인은 불안정한 재원 구조가 꼽힌다. 서울·부산은 재생에너지 판매수익이나 공기업 배당금 등 자체 수입원을 일부 갖추고 있지만, 경기·전남·전북은 전체 기금 수입의 77~97%를 일반회계 또는 특별회계 전입금에 의존한다. 지자체 살림이 나빠지면 기금도 자동으로 축소되는 구조다. 경기도는 2026년까지 출연금으로 1200억 원을 조성할 계획이었지만 재정 여건 악화로 현재 누적 조성액은 510억 원에 그쳤다.
이 같은 재정 공백은 지자체들이 스스로 수립한 탄소중립 계획도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녹색전환연구소가 별도로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17개 광역지자체의 온실가스 감축예산 이행률은 평균 67.3%에 그쳤다. 17곳 중 12곳이 스스로 수립한 재정투자 계획을 지키지 못했다.
"이름만 기후대응…LNG 발전소·음식물쓰레기 처리기에 예산"
더 큰 문제는 기금이 투입되는 사업의 성격이다. 연구소가 각 지자체의 2026년 기금운용계획을 분석한 결과 기후위기 대응과 무관하거나 관련성이 희박한 기존 사업을 그대로 편입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울시는 올해 기후대응기금 총지출의 31.3%인 92억8000만 원을 LNG 열병합발전소 유지보수 사업에 지출했다. 연구소는 "화석연료에 기반한 발전방식을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므로 사업의 합목적성에 의문이 제기된다"고 지적했다. 이 자금이 후순위로 밀린 재생에너지 보급이나 기술혁신 사업에 쓰였더라면 감축 효과가 컸을 것이라는 의미다.
부산은 올해 총지출 41억6000만 원의 63.8%인 26억 원가량을 자원순환 분야에 쏟아붓는다. 구체적으로는 폐기물 감량·도시청결 사업 7억8000만 원, 자원재활용 활성화 6억7000만 원, 가정용 음식물쓰레기 처리기 보조금 2억 원 등이 포함돼 있다. 이들 사업은 폐기물 관리 차원에서 일반예산으로도 충분히 추진할 수 있는 것들로, 기후대응기금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전국 광역지자체 온실가스 배출량 2위인 전남은 올해 기금 지출 전액 4억3000만 원을 '전남형 탄소중립포인트제 플랫폼' 개발 단 하나의 사업에만 사용한다. 농축산업 배출 비중이 높은 전북은 영농폐자재 수거, 투명페트병 재활용 촉진 등 소규모 지원사업에 나눠 지출했다. 경기도만이 민간 태양광 융자지원, RE100 선도사업, 기후테크 스타트업 육성 등 실질적인 감축 프로젝트를 발굴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거버넌스도 형식에 머물고 있다. 5개 지자체의 기금운용심의위원회 회의록을 분석한 결과, 외부 위원들은 대부분 간략한 서면의견을 제출하고 운용계획안에 만장일치로 찬성하는 양상이 반복됐다. 위원회가 사업 기획 단계에는 관여하지 못한 채 사후 심의에 그치는 탓이다. 경기도를 제외한 4개 광역지자체는 사업별 온실가스 감축 효과를 정량적으로 평가하지도 않고 있다.
광역지자체 기후대응기금 지출 규모. (자료 녹색전환연구소)/뉴스펭귄
해외는 달랐다…탄소세 연동·부담금 환원·녹색채권으로 기금 키워
반면 해외 주요 지방정부의 사례는 한국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스페인 카탈루냐주의 '기후기금(El Fons Climatic)'은 탄소세를 재원으로 활용하는 세입 연동형 기금이다. 기후변화법에 따라 내연기관차의 탄소배출에 부과되는 세금의 50%가 법적으로 이 기금에 적립된다. 그 결과 2024년 기금 규모는 약 1억7800만 유로(약 2900억 원)에 달한다. 카탈루냐 전역 432개 지자체에서 제출된 585건의 사업계획을 공개경쟁으로 선별해 지자체 기후정책 지원, 기업 탈탄소 전환, 농림어업 분야 감축 등에 지원한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청정산업기금(CIF)'은 오염자 부담 원칙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모델로 꼽힌다. 연간 온실가스 1만 톤 이상을 배출하는 고배출 사업체로부터 부담금을 징수해 해당 업체의 감축 프로젝트에 재투자한다. 오염 유발자가 낸 돈을 그 업체의 감축에 쓰는 구조로, 재원 출처와 쓰임이 일치한다. 광업·석유·천연가스·화학·펄프 등 지역 주력 고배출 산업의 저탄소 전환에만 집중 투자하며, 2024년 한 해 36개 사업에 1억1500만 캐나다달러를 집행했다.
영국 런던시의 '녹색금융기금(GFF)'은 차입 기반 금융형 기금이다. 영국 국부펀드 차입, 녹색채권 발행, 민간 기관투자자 대출, 지역 주민 크라우드펀딩 등 다양한 경로로 재원을 마련한다. 런던 교통공사의 초저공해 배출구역(ULEZ) 확장, 런던 지하철 LED 조명 교체, 런던 박물관 탈탄소화 등 공공부문 인프라의 탈탄소에 자금을 집중 투입하며, 최근 3년간 3억 파운드 이상을 투자했다. 모든 지원 사업에 대해 연간 온실가스 감축량, 에너지 절감량, 재생에너지 발전량 등을 수치로 공개해 투명성을 확보하고 있다.
"재원 이전·사업 집중·거버넌스 개혁 시급"
연구소는 이슈브리프에서 세 가지 개선방안을 제시했다. 이들은 우선 중앙정부에 집중된 환경·에너지·교통 관련 세입을 지방으로 이전해 안정적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교통·에너지·환경세나 자동차세 주행분을 지방 재원으로 전환하고 지자체가 녹색채권 같은 기후금융 수단도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지역 특화 사업 발굴이 필요하다고도 언급했다. 예를 들면 부산은 해운·항만·물류산업 감축 프로젝트를, 전남은 석화단지 공정개선 사업을, 전북은 제조업·농축산업 분야 중소규모 사업체 지원 프로젝트를 발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금운용심의위원회가 사후 심의가 아닌 사전 기획 단계부터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도록 거버넌스 구조를 개편하고, 사업별 온실가스 감축효과를 정량 평가하는 성과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조원영 녹색전환연구소 경제전환팀 연구원(보고서 저자)은 "지역 기후대응기금이 단순한 재정 칸막이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재원과 민간 투자를 끌어들이는 마중물이 돼야 한다"면서 "기후대응기금을 녹색·전환금융 및 각종 공공·민간재원과 결합시킴으로써 기존 재정의 한계를 뛰어넘는 감축투자의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연구소 측은, 해당 지자체들이 관련 조례를 제정하고 기후대응기금을 마련한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윤원섭 녹색전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9일 <뉴스펭귄>과의 통화에서 “다른 광역 지자체 중에는 아직도 기후대응기금이라는 게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공무원들도 있었다”면서 “이와 같은 제도가 현재 시행 중이고 기금 운용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공론화되면 앞으로 다른 지자체에서는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준비를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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