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리아] 전쟁 여파로 의료용품 공급망 불안이 제기되자 정부가 선제 대응에 나섰다. 과거 코로나19 당시 마스크 대란과 유사한 수급 위기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정부의 개입 방식은 당시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7일 보건복지부를 비롯해 공정거래위원회, 식품의약품안전처,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 부처와 합동 브리핑을 열고 의료제품 수급 불안에 대해 엄정 대응 방침을 밝혔다. 정부는 수액제 포장재, 주사기, 주사침 등 6개 품목을 집중 관리 대상으로 지정하고, 향후 3개월간 수급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응 체계를 구축·운영하기로 했다. 의료 용품 생산에 필수적인 나프타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산업부와 협의를 진행 중이다.
시장 질서 교란 행위에 대한 대응도 병행된다. 정부는 사재기, 가격 담합, 출고 조절 등 불공정 행위가 적발될 경우 신속한 조사에 착수하고, 위반 기업에 대해 관련 매출액의 최대 20%까지 과징금을 부과하는 등 강도 높은 제재를 예고했다.
이 같은 대응은 코로나19 초기 마스크 수급 대란 당시와 비교되며 주목된다. 당시 정부는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긴급수급조정조치를 통해 마스크 생산과 유통을 직접 통제하고 공적 판매 체계를 도입하는 등 강력한 시장 개입에 나섰다. 매점매석 행위에 대해서는 2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 벌금의 형사처벌이 적용됐으며, 이후 3년 이하 징역 또는 1억 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 수위가 강화됐다.
다만 실제 법 집행 과정에서는 처벌 요건이 엄격하게 해석되면서 한계도 드러났다. 대법원은 코로나19 시기 마스크를 대량 보관하거나 판매를 지연한 경우에도 ‘폭리 목적’이 입증되지 않으면 매점매석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대법원은 2024년 KF94 마스크 약 3만2000개를 매입해 일부를 장기간 보관한 마스크 판매업자 A 씨에 대해 1·2심 유죄 판단을 뒤집고 사건을 파기환송 했다. 해당 사업자가 코로나 유행 이전부터 영업을 준비해왔고 시장 가격과 유사한 수준으로 판매를 시도한 점 등을 근거로 폭리 목적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코로나19 당시 대응은 형사처벌 중심의 강력한 통제였지만, 폭리 목적 입증이 어렵다는 법적 한계로 실효성 논란이 따랐다. 반면 이번 조치는 수요 급증이 아닌 원자재 수급 불안에서 비롯된 만큼, 개인 단속보다 기업 단위의 시장 교란 행위를 공정거래법상 과징금으로 제재하고 공급망 자체를 관리하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해외 주요국들도 중동 지역 긴장 고조와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해 의료 공급망 전략을 재편하고 있다. 생산 기반을 자국 또는 우방국으로 이전하고 민간 참여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공급망 전략을 재편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핵심의약품법을 통해 단순한 생산 확대를 넘어 회원국 간 역할 분담에 기반한 공급망 재편에 나서고 있다. 항생제와 주사제, 원료의약품(API) 등 전략 품목을 지정한 뒤, 각국의 산업 기반에 따라 원료 생산과 완제의약품 제조 기능이 분화되는 구조를 구축하고 이를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구조다. 화학 산업이 발달한 독일은 원료의약품과 중간체 생산에 강점을 보이고, 프랑스는 대형 제약사를 중심으로 완제의약품과 백신 생산 역량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공동 비축과 공동 구매 체계를 결합해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유럽 전체를 하나의 의약품 공급망으로 통합하는 전략이 추진되고 있다.
미국은 보건 안보 관점에서 공급망을 재편하는 ‘프렌드쇼어링’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의료기기용 센서와 정밀 부품 공급망을 우방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의약품 원료의 경우 기존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인도 등으로 공급선을 다변화하는 것이다. 동시에 「국방물자생산법(DPA)」을 활용해 자국 내 주사기와 개인보호장비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도 확대하며 ‘국내 생산+우방국 협력’ 구조를 병행 구축하는 방식으로 제조시설 확충과 인프라 투자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일본은 공급망 병목 현상을 실시간으로 점검하는 관리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반도체와 에너지뿐 아니라 의약품과 의료 소모품 등에도 적용되며, 수급 불안 징후를 사전에 파악하는 데 활용된다. 최근에는 중동 지역 불안에 대응해 수혈용 혈액 제품과 투석 장비, 주사기·장갑 등 의료 소모품을 중심으로 공급망 점검에 나서는 전담 태스크포스를 구성하는 등, 특정 품목을 중심으로 한 선제 관리도 강화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일본 정부는 「경제안보추진법」을 기반으로 원료의약품(API) 생산을 해외에서 자국 내로 이전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해왔다. 최근 지정학적 리스크가 확대되면서 이러한 리쇼어링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의료 소모품 분야에서도 정부가 특정 품목의 공급 안정 필요성을 제시함에 따라, 기업들이 생산 여력 확보와 공급망 점검에 나서는 등 대응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위기 발생 이후 급격한 생산 확대에 나서기보다, 평시 구축된 생산 기반을 바탕으로 즉각 대응이 가능한 구조를 유지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