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와 AI·데이터 리스크 등 경영진 향한 법적책임은 강화 추세
국내 사이버 침해 사고 신고 건수 2025년 2383건에 달하며 가파른 우상향 곡선
“보험사가 지속적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리스크 측정 실질 해법 될 것”
최근 기업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보험 가입을 줄이는 ‘보험 이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뉴스투데이 이경진 기자] 최근 기업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역설적으로 비용 절감을 위해 보험 가입을 줄이는 ‘보험 이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재무 여건이 열악한 중소기업과 무형자산 비중이 높은 산업군 역시 기업 안전망의 구조적 불균형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10일 보험연구원의 ‘2024 정보보호 실태조사’에 따르면, 정보 침해 사고를 경험한 기업 중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무대응 비중이 67.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고 발생 후 관계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로는 ‘피해 규모의 경미(73.7%)’가 가장 많았으며, ‘신고 절차의 어려움(54.3%)’이 그 뒤를 이었다. 이는 기업들이 사이버 공격을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치부하거나, 복잡한 사후 대응 절차에 부담을 느껴 잠재적인 대형 리스크를 방치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중소기업의 리스크 방치 및 이탈 현상이 심화되는 가운데, 기업 경영진을 둘러싼 법적 환경 변화는 오히려 이들의 책임 범위를 전방위로 넓히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실질적인 사고 대응은 뒷전인 상황에서 경영진 개인이 짊어져야 할 법적 리스크만 비대해지는 ‘책임의 불균형’이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와 AI·데이터 리스크 등 경영진을 향한 법적 책임은 강화되는 추세다. 지난해 7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경영진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특히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강조하기 위해 명칭을 ‘독립이사’로 변경하고, 의무 선임 비율을 기존 4분의 1에서 3분의 1로 상향 조정됐다.
또한 감사위원 선임 및 해임 시 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일명 ‘3% 룰’을 강화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상장사에 전자주주총회 개최를 의무화하는 등 주주 권익 보호 장치가 대폭 확충됐다. 경영진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주의 이익을 소홀히 할 경우 직접적인 법적 책임을 질 가능성이 과거보다 현저히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경영진이 직면한 또 다른 위협은 급증하는 사이버 리스크다. 국내 사이버 침해 사고 신고 건수는 △2023년 1277건에서 △2024년 1887건 △2025년 2383건에 달하며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리스크 규모는 커지고 있으나 기업의 대응 체계는 여전히 미흡하다. 수요 측면에서는 복잡한 약관 탓에 보험의 실효성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해 부족’ 현상이 두드러진다. 특히 기업들은 보험 가입보다는 보안 장비 구입이나 컨설팅을 우선순위에 두며, 사고 발생 시 평판 하락을 우려해 보험 청구 대신 내부적으로 사건을 무마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보험 공급 측면에서도 한계는 뚜렷하다. 보험사들은 진화하는 사이버 위험에 비해 데이터와 모델이 부족해 보수적인 인수한도를 설정하고 있다. 상품 언어가 복잡해지면서 면책 조건과 서브리밋(보상 한도액)이 증가했고, 이는 곧 소비자들과의 분쟁 및 설명 비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도적 뒷받침 역시 갈 길이 멀다. 현재의 의무책임보험 중심 구조는 기업들이 보다 폭넓은 리스크를 보장받는 종합형 보험으로 업그레이드할 유인을 약화시킨다. 가입 인센티브 역시 부족하고 민간 보험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 리스크에 대한 정부 차원의 백스톱(최종 지원책) 장치도 미비한 실정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최근 기업 리스크가 환경(E)·사회(S)·기술·규제 등 다양한 요소가 얽힌 복합적·비정형적 형태로 변화함에 따라, 임원배상책임보험(D&O)을 단순한 비용이 아닌 경영판단을 지원하는 ‘전략적 인프라’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과거 기업 리스크는 매출 감소나 설비 사고 등 원인과 영향이 명확해 재무적 대비가 가능했다. 그러나 현대 기업의 리스크는 경영 전반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비롯되며, 발생 가능성과 파급 효과를 사전에 특정하기 어렵다. 정보유출이나 시스템 장애는 단순한 기술적 장애를 넘어 이사회의 감독 의무 이행 여부와 내부통제의 적정성을 따지는 ‘거버넌스 리스크’로 전환됐다.
이처럼 리스크 요인이 ESG 대응, 사이버 보안 등 비재무적 요소로 확장되면서 기업 조직 차원의 문제가 경영진 개인의 법적·재무적 부담으로 연결되는 경향이 강화됐다. 이사회와 임원은 리스크 관리 체계 구축과 합리적 경영판단 근거 확보라는 무거운 의무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이사회와 임원들은 단순히 성과를 내는 역할을 넘어, 자신의 경영 판단이 합리적이었음을 입증하기 위한 방어 체계를 스스로 구축해야 하는 전례 없는 압박에 직면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경영진의 리스크를 분산해 주는 임원배상책임보험(D&O)의 중요성이 재조명되고 있다.
국내 임원배상책임보험 시장은 지난 10년간 연평균 15.5% 성장하며 2024년 기준 계약 건수가 10년 전 대비 5배가량 증가했다. 특히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회사 및 주주’로 확대되면서 소송 리스크는 구조적으로 급증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임원배상책임보험이 과도한 법적 책임으로 인한 경영진의 의사결정 위축을 완화하고, 혁신 투자나 M&A 등 장기적 가치 창출을 가능하게 하는 효율적 계약 장치라고 평가했다. 우수한 외부 인재를 유치하고 이들이 안정적으로 직무를 수행하게 돕는 심리적·재무적 보호막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국내 임원배상책임보험은 높은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전체 책임보험 시장의 4.11% 수준에 머물러 있다. 상장사의 가입률은 70%를 상회하지만, 중견·중소기업의 참여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이에 따라 시장의 무게중심을 양적 확대에서 보장 수준의 고도화라는 질적 성장으로 옮겨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특히 국내 약관은 형사소송 방어비용 보상 여부나 손해배상 청구 범위에 대한 논란이 여전하다. 보험 기간 종료 후 제기된 청구에 대해서도 보호를 강화하는 ‘연장보고기간(ERP)’ 설정이나, 특정 임원의 잘못이 선의의 다른 임원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는 ‘책임 분리’ 규정 등 약관 체계의 정비가 시급하다.
전문가들은 임원배상책임보험이 실질적인 리스크 관리 수단으로 작동하도록 공시 제도를 정교화하고 정책적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독립이사 보호를 위한 최소 보장 한도 설정과 중소기업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상품 단순화 및 표준약관 마련 등이 주요 과제로 꼽혔다.
손재희 보험연구원 실장은 “과거 데이터에만 의존해서는 상품 설계나 인수가 매우 어렵다”며 “신뢰할 수 있는 중립적인 데이터 저장소를 어디에 설치할 것인지, 그 운영 방식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고민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보험사가 기업의 보안 통제 수준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소통하는 지속적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리스크 측정의 실질적인 해법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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