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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울산군향토지'를 통해 본 1930년대 '울산'

1930년대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경제 위기가 시작되었고 가장 참혹한 전쟁이 있었던 연대였다. 또 전 세계 경제 침체에다 파시즘 등 극단주의 정치세력의 활개로 세계 평화가 위협받던 시기였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1930년대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경제 위기가 시작되었고 가장 참혹한 전쟁이 있었던 연대였다. 또 전 세계 경제 침체에다 파시즘 등 극단주의 정치세력의 활개로 세계 평화가 위협받던 시기였다. 미국의 경제불황과 뉴딜 정책,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일본 군국주의의 발호와 중일전쟁(1937) 등 대륙 침략이 있었다. 1930년대 본격적인 일제의 탄압3과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은 모국어조차 빼앗겼다.

울산의 1930년대는 어땠을까. '울산군향토지'(1933년)를 통해 단편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일본어와 한자로 된 192쪽 분량의 등사본으로, 당시 경남도 지시로 울산군 교육회가 울산군 학무담당과 학교장 5명 등 일본인 6명을 편집위원으로 위촉해 발간했다. 1929~1931년의 울산의 통계 자료와 도표가 실려 있다.

1930년대 울산은 전형적인 농어촌 지역으로 식민지 근대화의 흐름이 서서히 스며들던 과도기의 현장이었다. 1936년 일제는 달리에서 '농촌 위생조사'를 했다. 당시 울산의 자연환경은 생태계가 풍부했다. 강동 무룡산과 언양 삼남 상북 등에 호랑이가 서식했고 큰 풍랑이 불 때마다 연안에 고래가 자주 떠내려 왔고 상어가 출몰하고 청량과 범서 지역에 학이 날아들었다. 제주 해녀들이 울산 연안을 왕래하며 활동한 사실도 확인되는데, 이는 울산이 해양을 통해 다른 지역과 연결된 생활권이었음을 시사한다.

인구는 모두 14만 4,140명(한국인 14만 709, 일본인 3,401으로 2.36%)에 30명의 외국인과 2만 7,358호(일본인 963호, 3.65%)의 가구가 거주했다. 일본인은 울산읍과 방어진, 장생포, 대현 등 특정 지역에 집중 거주했고 경제와 행정의 중심을 차지했다. 소수지만 권력과 자본을 장악한 일본인이 지역 사회를 주도하는 식민지 사회의 전형적인 구조가 울산에도 작동하고 있었다.

1933년 울산군교육회가 발간한 등사판 '울산군향토지'표지. 윤대헌 제공

경제는 농업 중심으로 어업과 다양한 부업이 함께 존재하는 복합적인 구조였다. 생산액과 소비액, 직업 분포, 노동력 상황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경제가 점차 화폐 경제로 편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금융조합이나 계, 無盡講(상호신용계) 타노모시강(賴母子講, 민간 금융조합) 등 고리의 금전 대부업 같은 상호부조 금융이 활발했다. 근대적 경제 체제와 전통적 공동체 경제가 공존하는 과도기였던 셈이다.

교통과 기반 시설 변화는 울산의 근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이고 중요한 지표이다. 자동차는 울산읍(23대)과 대현, 온양(각 4대), 언양(12대)에만 있었고 승합차는 모두 10대, 자전거는 울산읍에 302대가 있었다. 1921년 경편철도 개통으로 대구와 울산이 연결되면서 1935년 동해남부선 개통과 함께 울산역이 설치되었다. 또한 삼호교 울산교 산전교 울산 철교 건설로 이동 수단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었다. 나아가 울산 비행장(1928년 개장) 이용객이 연간 1,180명, 일본 왕복객이 1,190명으로 집계됐다. 유치원(1곳, 오덕상의 울산유치원) 소학교(6곳), 서당(27곳)과 기타 사설 강습회, 야학교 언문 강습회가 있었고 울산도서관이 1922. 9. 20 경남 최초로 울산보통학교에 설립했다. 전등은 202호에 2,741개가 배전됐지만 울산읍과 병영, 방어진 등에만 공급되었다.

전통문화의 변화도 보인다. 혼례나 장례 같은 중요 행사 때 마을 계가 상부상조 풍습을 지켰지만 전통 혼례의 감소와 자유 결혼의 증가, 기독교 교회의 확산과 기존 불교의 약화, 일본 신사와 포교소(3곳) 등 다양한 종교의 혼재가 확인된다.

방어진의 나카베(中部 幾次郞)나 도평의원인 서생면의 모리(守谷利助)가 어업을 통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했다며 명사로 소개한 것은 일본인 사업가들을 지역 개발의 공로자로 강조하는 식민지 시기 특징적인 서술 방식이다. 반대로 서말극(조선인 여성)을 당시 사회가 요구한 이상적 인간상인 '절부'의 사례로 제시해 전통적 가치와 순종을 강조했다. 조상 숭배와 효, 인내심은 울산의 장점이고 낮은 민도와 미신, 여성의 낮은 권리는 단점이라 지적해 울산인을 '개선의 대상'으로 보고 농촌 계몽과 통치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논거로 동원했다.

울산군향토지는 "근대화 과정의 울산에 대한 기록"이자 "식민지 통치 속에 재구성된 울산"을 보여주는 자료이지만 식민 지배의 숨은 의도는 비판적 시각으로 봐야한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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