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학 총장들이 10년 이상 재직하며 혁신의 기틀을 마련하는 사이 국내 대학은 4년 내 총장 임기를 마무리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이미지=한국대학신문 DB)
[한국대학신문 김소현 기자] 오랜 기간 지성의 전당으로 불려 온 대학이 위기를 맞고 있다. 급격한 학령인구 감소로 지방 소재 대학부터 하나둘 문을 닫고,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대학은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시기에 도래한 것이다.
이에 변화를 준비하는 대학들이 점차 늘고 있다. 그러나 ‘단임제’에 묶인 국내 대학이 단 몇 년 만에 내부 혁신을 이루기에는 어려움이 큰 것이 현실이다.
예컨대 애리조나주립대(ASU)는 장기 리더십 아래 20년가량 ‘New American University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며, 시대 변화에 맞춰 진화한 장기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이와 달리 국내 대학은 임기 내 단기 비전을 설정하고 수행하기 위한 밑바탕을 정비한 뒤, 또 다른 리더십 체제로 전환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 대학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본지는 ‘대학, 거대한 침묵을 깨다’ 시리즈를 연재하며 한국 고등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과 혁신의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20년 총장’이 만든 변화… 해외 대학 혁신에는 ‘장기 리더십’ 존재
= 앞서 언급한 ASU와 같이 총장이 장기간 재임하며 대학 혁신을 이끈 해외 주요 사례는 적지 않다. 이들은 단순히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킬 뿐 아니라 대학의 구조 자체를 바꿔 명문대학으로 발전할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로 2002년부터 제16대 총장으로 재직 중인 마이클 크로우(Michael Crow) ASU 총장을 들 수 있다. 그는 대학의 철학을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는 기관’에서 ‘더 많은 학생을 성장시키는 대학’으로 전환했으며, 포용성과 과감성을 기반으로 교육 혁신을 추진했다. 이에 대학을 단순한 교육기관에서 문제 해결형 대학으로 탈바꿈한 동시에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무는 캠퍼스 형태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산업과의 연계에도 집중해 대학을 지역 경제를 살리는 플랫폼으로 발전시켰으며, 맞춤형 인재를 양성해 지역 산업의 성장을 이끌었다. 피닉스가 반도체·신기술의 메카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배경에는 ASU에 재학 중인 약 3만 명의 공학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마이클 크로우 총장이 20여 년간 총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ASU의 평판도 나날이 상승 추세를 보였다. U.S. News & World Report는 ‘가장 혁신적인 대학’ 부문에서 ASU를 11년 연속 1위로 꼽았으며, 지난해 ASU의 연구비 지출액은 10억 달러 수준으로, 마이클 크로우 총장이 취임한 2002년 이후 8배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찰스 베스트(Charles M. Vest) 총장 역시 1990년부터 2004년까지 MIT를 이끌며 대학 교육의 개방성과 접근성을 크게 높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01년 ‘MIT 오픈코스웨어(OpenCourseWare)’를 무료로 공개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기반으로 전 세계 온라인 교육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당시 여성 교수진의 성평등 보고서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등 다양성을 존중하며 캠퍼스 내 혁신을 이뤄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1929년부터 1945년까지 시카고대학에 재임한 로버트 허친스(Robert Maynard Hutchins) 총장은 교양교육 중심의 커리큘럼 개편을 추진하며 당시 대학에 토론식 교육을 정착시켰다. 그는 장기 리더십 아래 교육의 본질에 집중했으며, 시카고대에 교양교육 모델이란 정체성을 확립시켰다.
평균 4.3년… 짧은 임기 속 끊기는 대학 전략
= 이처럼 해외 대학 총장들이 10년 이상 재직하며 혁신의 기틀을 마련하는 사이 국내 대학은 4년 내 총장 임기를 마무리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이하 사총협)가 발간한 ‘2024 한국의 대학 총장’ 통계에 따르면, 2024년 12월 기준 국내 대학 총장의 평균 재직 기간은 4.3년으로 조사됐다. 국내 대학 총장 10명 중 7명(76.0%·139명)은 신임 총장이었으며, 3회 이상 재직한 비율은 13.1%(24명), 2회 재임은 10.9%(19명) 순으로 뒤를 이었다.
국내 대학 총장의 임기는 4년 이하로 규정돼 있으나, 법적으로 재임이 가능하다. 이에 사립대학에서 연임 총장이 종종 목격된다. 최근 5년간 사립대학 총장의 2회 이상 연임 비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다 2024년 16.6%로 소폭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대학의 경우 한국보다 총장의 평균 재직 기간이 조금 더 긴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대학 총장들의 취임 후 평균 재직 기간은 2022년 7월 기준 5.9년으로, 한국 대비 1.6년 길었다.
다만,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거나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 온 총장의 경우 10년 이상 재직하며 비전을 바꿔온 사례도 많아 해외 총장의 재임 기간은 보다 유연성을 띠는 편이다.
김규석 IES 서울 센터장은 “미국의 총장 시스템은 성과가 있다면 계속해서 총장직을 이어가는 철저한 성과·평가 위주에 가깝다”며 “국내의 경우 4년, 연임 제한 등으로 총장직에 제한이 있다면, 미국 대학은 보다 유연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해외 총장들은 대학의 구조를 획기적으로 재설계하거나 장기적인 산학협력 프로젝트를 통해 생태계를 발굴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찰스 윌리엄 엘리엇(Charles William Eliot) 총장은 1869년부터 1909년까지 무려 40년간 하버드대 총장을 지내며 하버드대를 세계적인 연구 중심 대학으로 성장시켰다. 나아가 미국 고등교육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재정·구조 한계에… 혁신보다 ‘버티기’에 집중
= 비교적 짧은 재임 기간과 경직된 조직 구조로 인해 국내 대학은 ‘혁신’보다 시설 보수를 위한 재원 확보에 급급한 모습이다. 사총협이 지난해 발표한 ‘2025 대학 현안 관련 조사’에 따르면, 대학 총장들은 2025학년도에 인상한 등록금의 사용처 1순위로 ‘교육환경 및 시설 개선’을 꼽았다. 장기간 이어진 등록금 동결 정책에 따라 교내 환경과 시설을 개선하는 데 우선 재원을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같은 조사에서 10명 중 9명의 총장이 대학 혁신 방안으로 ‘AI를 활용한 맞춤형 교육과정 개발’을 꼽은 것과는 대비된다.
황인성 사총협 사무처장은 “대학 혁신을 위해서는 총장, 교수, 학생이 한 몸으로 톱니바퀴처럼 움직여야 가능하다. 이처럼 교내 구성원을 움직이려면 인센티브 등의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며 “우수 교원을 유치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듯 결국 혁신은 조직 유연성과 자금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라고 분석했다.
장기 리더십 부재에 순환 보직까지… 국내 대학 혁신 동력 약화
= 해외 대학들이 장기 리더십을 바탕으로 혁신의 방향을 축적해 나가는 것과 달리, 국내 대학은 총장 교체와 더불어 정책 기조가 바뀌는 일이 반복되며 연속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장기적인 비전 수립과 실행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한 교육계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경우 사학의 비중이 높다 보니 장기적인 리더십에 따른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단임제가 이어지고 있다”며 “교내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고 학교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낸 인사가 임기에 의해 총장직을 마무리하는 것은 조직에도 손해다. 혁신이 필요한 대학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비전을 펼칠 수 있도록 부분적으로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으로는 ‘교수 중심’의 대학 구조가 혁신의 발목을 붙잡는 구조적 모순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교육계 관계자는 “국내 대학의 경우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는 교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지만, 총장의 리더십을 뒷받침할 또 다른 ‘전문가 집단’의 부재가 한국 대학의 발전을 저지하고 있다”며 “대학이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행정’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없는 ‘대학 홍보’ ‘학생 상담’ ‘위기 관리’ 등이 수반돼야 하는데, 각각의 기능을 뒷받침할 전문가층이 우리나라의 경우 전무하거나 너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조직 내 균형이 깨지며 혁신의 발판을 만들기 어려운 구조가 굳어졌다는 평이다. 그는 “학생의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는 교수진과 학교라는 거대한 조직이 돌아갈 수 있도록 이를 뒷받침할 전문가 그룹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며 성장해야 하지만, 국내 고등교육은 교수진에 모든 중심이 기울어져 있다”며 “이러한 전문가층이 굉장히 얇아 총장 리더십 아래서 혁신을 만들어 내기 위한 ‘탑다운’ 방식이 많이 목격된다. 이에 교내 구성원들은 총장의 지시에 따르기 급급하고, 총장을 뒷받침할 전문적 인력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교내 ‘순환 보직’ 역시 구성원들의 발전을 저지하는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전문 영역에서 경력을 쌓으며 역량을 갈고닦을 시기에 리더십의 주기적인 교체와 맞물려 3~4년 만에 보직을 변경하면서 경력 경로가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전문성이 일관되게 유지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나라에 있는 전문가를 만나면 사실상 게임이 안 되는 구조”라며 “수도권 대학은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이러한 상황은 악화하고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이 존재하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결국 전문가 양성 시스템의 부실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양대 총장을 지내며 산학연계 교육 플랫폼 ‘IC-PBL’을 발전시킨 김우승 한국공학교육인증원장도 혁신을 위해서는 ‘지속 가능성’이 담보돼야 한다고 제언한다.
김 원장은 “혁신안이 구호로만 그치지 않으려면 오랜 기간 체득하고 적용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득이 필요하다. IC-PBL도 처음 네 과목에서부터 시작했다”며 “해외 대학의 경우 재임 기간에 한계가 없어 좋은 아이템이 ‘레거시(legacy)’가 되기도 하고, 다음 총장이 이어받아 장기화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혁신적인 모델이 지속적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나무가 뿌리 내릴 만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대학 혁신의 성패는 개별 정책에서 나아가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구조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다. 단기 성과에 머무를 것인지, 장기 전략을 축적하는 체제로 나아갈 것인지에 따라 한국 고등교육의 미래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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