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B 포트가 제각각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다행히 충전기 하나를 찾느라 서랍을 뒤지던 불편은 USB-C타입이라는 하나의 표준으로 정리됐다. 그리고 서로 다른 기기가 같은 언어로 소통하기 시작하자 소비자의 부담은 줄고 시장은 넓어졌다.
디지털 산업이 마주한 지금의 과제도 그 본질은 같지 않을까. 데이터와 기기와 서비스가 칸막이 없이 연결되는 상호운용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의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면 상호운용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숙명에 가깝다. 무슨 뜻일까. 상호운용성의 무게가 커지는 배경에는 AI 대전환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류제명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관은 국회 의원회관 제2간담회실에서 21일 열린 '디지털 기술 상생 발전과 소비자 편익 확대를 위한 상호운용성 개선 방안' 토론회 축사에서 "AI는 똑똑한 알고리즘에 그치지 않고 우리 주변의 모든 데이터와 기기를 하나로 연결하는 지능형 생태계로 진화하고 있다"고 짚었다.
그는 나아가 AI 신약 개발 기업 인실리코 메디슨이 흩어진 데이터를 표준화해 학습시킨 결과 신약 개발 시간을 절반 이상, 비용을 90% 정도 줄인 사례를 들며 "데이터가 흐르고 API가 열리며 기기가 소통하는 상호운용성이 보장되면 파편화된 정보와 기술이 AI와 결합해 비즈니스 성공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완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결과 개방이 있기에 상호운용성이 가동, 이를 바탕으로 혁신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AI 시대가 상호운용성을 절실하게 만드는 또다른 바로 창업의 풍경을 바꾸기 때문이다.
당장 이원철 숭실대 교수는 앤트로픽이 지난해 내놓은 모델 컨텍스트 프로토콜(MCP)을 두고 "AI의 USB-C타입"이라며 예전에는 AI가 데이터에 접근하려면 그때그때 맞는 API를 새로 개발해야 했지만 MCP라는 공통 규격이 그 부담을 걷어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AI 에이전트가 활성화되면서 1인 삼성전자가 나올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며 "그 밑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상호운용성"이라고 말했다. 혼자서도 거대 기업에 맞설 수 있는 시대의 토대가 연결과 개방에 달려 있고, 그 상호운용성은 AI 시대를 맞아 더 강력한 잠재력을 자랑한다는 메시지다.
문제는 그 길이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모바일 생태계는 애플과 구글이라는 두 운영체제(OS)의 수직 구조에 갇혀 있다. 이 교수가 "수평적인 생태계에 대한 상호운용성은 100% 보장되지 않고 있다"며 그 부담이 중소기업의 개발 비용과 소비자의 불편으로 돌아간다고 지적한 이유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이 서비스를 만들어도 시장에 내놓을 공정한 운동장이 없다는 현장의 호소는 토론 내내 되풀이됐다.
맞다. 역사를 돌아보면 상호운용성을 외면한 기업은 대가를 치렀다.
송경재 상지대 교수는 "개인용 컴퓨터를 최초로 보급한 애플이 1990년대에 상호운용성 문제를 간과해 IBM의 조립식 PC에 밀려 위기를 겪은 것이 대표적인 실패 사례"라고 말했다. 반면 USB-C타입의 보급은 성공 사례로 꼽힌다. 송 교수가 특히 주목한 대목은 유럽연합의 전략이었다. 그는 "유럽연합이 기술의 우수성이 아니라 글로벌 이슈였던 환경 문제를 무기로 USB-C타입을 강제했다"며 소비자 편익과 환경이라는 가치로 빅테크를 움직인 정책 전환을 한국이 참고할 시사점으로 들었다.
상호운용성이 한쪽만 이롭게 한다는 통념도 있다. 사실일까? 유영국 한신대 교수는 "고립된 혁신은 도태하고 연결된 융합은 진화한다"는 초연결 시대의 명제를 인용하며 기대와 우려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고 봤다. 상호운용성을 제공하는 사업자도 사업 분야를 다변화하거나 다른 서비스와 결합해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만큼 어느 한 편의 유익으로만 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의무를 지는 사업자를 누구로 정할지가 입법의 승부처라고 짚었다. 유럽의 DMA나 독일 일본의 입법이 그렇듯 수범 사업자 지정 기준을 세우는 일이 가장 어려운 과제라는 진단이다.
이 지점에서 사후 규제의 한계가 드러난다. 조혜신 한동대 교수는 "경쟁법 규범이 추상적이어서 해석을 다투는 데 수년이 소요되는 것은 기술 기반 시장에서 큰 우려"라고 말했다.
제시한 대안은 유럽연합의 사전 규제다. 유럽 집행위원회는 게이트키퍼로 지정한 애플에 2025년 3월 맞춤형 의무를 부과했다. 타사 웨어러블 기기가 아이폰과 원활히 연동되도록 하고, 개발자의 상호운용 요청을 예측 가능한 기한 안에 처리하도록 한 결정이다.
구글에 대해서도 2026년 1월 유사한 절차가 시작돼 자사 AI 서비스와 경쟁 AI의 동등한 접근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조 교수는 "기존 경쟁법 집행만으로는 중대한 한계가 있다"며 사전적으로 경쟁 기회를 열어주는 입법 논의가 진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회 정경. 사진=이코노믹리뷰DB
한편 상호운용성은 기업과 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운영하던 정보 시스템이 민간 클라우드로 이관되는 과정에서도 한 지방자치단체가 계약 만료 후 다른 사업자로 옮기지 못하는 종속 현상이 나타났다.
정부도 움직이고 있다. 남석 과기정통부 통신정책관은 망 개방과 번호 이동성 정책의 경험을 들며 "경쟁법만이 아니라 산업 정책적 관점을 함께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신승한 시장조사심의관은 지난해 현행 금지 행위 조항을 활용한 행정지도로 이종 OS 간 메시지 상호운용성을 푼 사례를 소개하며 "상호운용성 확보는 독과점화된 디지털 시장에 공정 경쟁의 룰을 세우고 소비자 주권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 모든 전략적 판단들은 소비자 편익으로 좁혀진다. 플랫폼을 만들어 서비스를 가두는 방식으로 수익을 키우던 시대에서, 개방된 기반 위에서 혁신가들이 새로운 서비스를 빚어내는 시대로의 전환. 그 전환의 길목에 상호운용성이 놓여 있다는 뜻이다.
이원철 교수가 빌려온 '담장 없는 정원'의 비유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각자의 정원이 아니라, 담을 허물어 모두가 그 조화를 만끽하는 정원. 상호운용성이 향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물론 담장을 허무는 일은 한 부처나 기업의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 생태계 구성원 모두의 협력과, 그것을 떠받칠 법 제도의 손길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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