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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언양 선정비가 들려주는 교훈

언양현은 본래 신라 거지화현(居知火縣)인데, 경덕왕이 '헌양현'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양주와 울주의 속현으로 있다가 1143년(인종 21) 감무를 파견하여 주현(州縣)이 되었다. 이후 언제인가 언양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언양현은 본래 신라 거지화현(居知火縣)인데, 경덕왕이 '헌양현'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양주와 울주의 속현으로 있다가 1143년(인종 21) 감무를 파견하여 주현(州縣)이 되었다. 이후 언제인가 언양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413년(태종 13) 언양현의 수령 명칭이 감무에서 종6품 현감으로 바뀌면서 언양 현감이 언양의 수령이 되었다.

조선 전기의 전체적인 언양현감 명단은 없고, 조선 후기에 '언양현선생안'에 일부 남아 있다. 임진왜란으로 울산도호부와 경주부의 속현이 되었다가 언양현의 이름이 회복된 1612년(광해군 4) 이응명(李應明) 현감부터 1894년(고종 31) 마지막 현감 윤홍식(尹弘植)까지 명단이 실려 있다.

언양향교 앞에는 오래된 선정비들이 모여있다. 비바람에 닳고 햇빛에 바랬지만, 저마다 한 시대의 흔적을 품고 있다.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다. 한 고을의 백성이 한 사람의 목민관을 어떻게 기억했는지를 새겨 둔 역사책이라 할 수 있다. 관청의 기록은 공적을 적지만 선정비는 은혜를 기억한다.

조선시대 언양에는 수많은 현감이 부임했다. 어떤 이는 관직과 함께 사라졌고, 어떤 이는 작은 돌 하나에 새겨져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왔다. 그 가운데 언양 사람들이 가장 오래 기억한 현감은 누구였을까. 선정비를 읽으면 조선시대 백성이 바랐던 행정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비문에는 화려한 치적이 많지는 않다.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는 자랑이나 자신의 이름을 높였다는 기록보다 선정을 기록해 놓았다. 반복되는 글귀는 대개 이러하다. "군포의 폐단을 고쳤다. 환자곡을 균등하게 했다. 흉년에 백성을 구했다. 노인의 삶을 돌보았다. 세금과 부역의 부담을 덜었다" 등이 주를 이룬다. 백성은 수령을 업적으로만 평가하지 않았다. 민생 즉 자신의 삶이 얼마나 더 나아졌는가로 평가했다. 오늘날 지방행정의 평가 기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언양의 역사에서 임훈(林薰)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는 백성의 고통을 임금에게 올린 현감이었다, 1566년(명종 21) 언양 현감으로 부임했다. 효행으로 이름난 인물로 늙은 부친을 정성껏 봉양하여 조정의 인정을 받았고, 그 덕망으로 지방관에 임명되었다. 그가 마주한 언양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계속된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은 무너지고 있었다. 농토는 황폐해지고, 세금과 부역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졌다. 많은 관리들은 정해진 임기만 채우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임훈은 임금에게 '언양진폐소(彦陽陳弊疏)'를 올렸다. 백성에게 과중하게 부과되는 부담과 불합리한 수취 제도, 끝없이 이어지는 부역의 문제를 낱낱이 밝혔다.

언양읍 사무소에 있는 언양현감 김천상 영세불망비. 김잠출 제공

"언양 백성을 살려 달라" 그것이 상소의 중심이었다. 수령이 자신의 고을의 어려움을 조정에 알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임훈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평판이 아니라 백성의 대변자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언양진폐소'는 오늘날까지 남아 16세기 언양의 사회상을 보여 주는 귀중한 기록이 되었다.

임훈이 백성의 고통을 세상에 알린 목민관이었다면, 김천상(金天相) 언양 현감은 그 고통을 현실에서 덜어 준 실천적 행정가로 평가할 수 있겠다. 영조 32년(1756)에 언양 현감으로 부임한 그의 이력은 특이하다. 무관 출신으로 높은 품계를 지녔던 그가 작은 고을의 현감으로 내려온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 역시 자신의 출신보다 백성의 삶을 먼저 보았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헌산여지승람'의 편찬이다. 반구대와 작괘천을 기록하고, 화장굴과 천전리 석불 설화를 실었다. 정몽주의 '언양 중양절 감회'를 실어 언양의 충절과 문향의 전통을 드러내기도 했다. 단순한 읍지 편찬이 아니라 언양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문화운동으로 언양의 정신을 일구었다. 그가 떠난 뒤 언양 사람들은 큰 바위에 '政善三載 民蒙救荒 浩浩恩澤 高    猶輕'이라고 새겼다. 3년간 선정을 베풀어 백성이 흉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한 은혜가 넓고 커서 고헌산이 오히려 가벼울 정도라는 칭송이다.

언양의 선정비가 전하는 교훈은 '정치는 민생 즉 백성을 살리는 일'이며, '행정은 주민의 삶을 따뜻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선정비가 전하는 묵직한 교훈이자 오래도록 전해져 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단체장들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김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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