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손예진
“가장 도전적인 역할 중 하나였다.”
홍콩 유력 매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넷플릭스 시리즈 ‘스캔들’에서 조씨 부인을 연기한 배우 손예진에 대해 이같은 평가를 내놨다.
“오랫동안 사극을 피해 왔었다”고 고백한 손예진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2002) 이후 무려 24년 만에 다시 한복을 입기로 결심한 대목과 맞닿는다. ‘스캔들’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손예진은 묵묵히 주어진 몫을 부족함 없이 소화했다.
고여 있기를 거부하는 배우. 손예진은 지난 1999년 화장품 모델로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디딘 후 단 한순간도 성공한 이미지를 재탕하고 답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연기력 논란 한번 없었던 그는 ‘스캔들’에서도 새로운 얼굴을 빚어냈다.
왜 손예진은 오랜 기간 사극을 피한 것일까? 지난달 29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에게 직접 물었다.
“데뷔 직후 어릴 때 사극을 촬영하며 너무 힘들었어요. 인모로 만든 가체를 쓰면 마치 망치로 머리에 못을 박는 느낌이었죠. 여전히 사극 연기가 두렵지만, 조씨 부인이라는 캐릭터는 거부할 수 없었어요. 인간이 욕망을 펼치지 못하면 결핍이 생기는데, 만약 21세기에 살았다면 멋지게 자아실현을 할 수 있었을 인물이 그 시대에 느낀 속박과 제약을 표현하고 싶었죠.”
‘스캔들’은 앞서 배우 이미숙, 배용준, 전도연이 출연한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로 제작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시리즈는 영화가 아닌 1782년 발표된 프랑스 작가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사회적 금기 때문에 미묘한 감정을 나누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촌 동생 조원(지창욱)과 발칙한 내기를 벌이는 조씨 부인의 비릿한 미소와 의뭉스러운 속내는 손예진 특유의 기품 있는 연기와 묘한 조화를 이뤘다. 이렇듯 하나의 색으로 규정될 수 없는 조씨 부인의 매력이 손예진을 ‘스캔들’로 끌어당겼다.
넷플릭스 ‘스캔들’에서 손예진이 연기한 조씨 부인
손예진이 조씨 부인 역을 맡은 것이 놀랍다는 반응도 있다. 영화에서는 전도연이 연기했던 또 다른 주인공이자 남편을 여읜 뒤 정절을 지키려 노력하는 희연 역이 오랜 기간 청순의 아이콘이었던 손예진과 썩 잘 어울린다고 보는 시선도 많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보기 좋게 벗어난 뒤 자기 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손예진이 하나의 수식어로 규정되지 않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워가는 방법이다.
“25년 넘게 배우 생활을 하며 가장 큰 부분에서는 결혼 전과 후로 나눌 수도 있어요. 40세가 넘어가면서 제 나이에 중년 배우로서 보여드릴 수 있는 챕터들이 한 장씩 덮히고,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조씨 부인은 ‘새로운 장’의 시작이죠. 지인이 제게 ‘예진씨가 희연이 아닌 조씨 부인을 연기하는 나이가 됐네요’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이렇듯 하나의 챕터를 넘어가는 순간이고, 그 기점에 있기 때문에 ‘스캔들’은 제게 소중한 작품이에요.”
손예진은 ‘결혼한 여배우’라는 수식어가 갖는 기존의 이미지도 보기 좋게 허물고 있다. 한국 연예계에서 ‘결혼과 출산’은 꽤 오랜 기간 여배우로서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의미처럼 해석됐다. 하지만 ‘스캔들’을 마친 그는 이미 넷플릭스 ‘버라이어티’를 통해 내년 농사도 근사하게 지어 놓았다. 남편 이전에 동료 배우인 현빈와 자신의 이미지가 사적으로 소비되는 인터뷰는 삼가면서도 SNS를 통해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살짝 공개하는 등 ‘인간 손예진’과 ‘배우 손예진’의 사이에서 절묘하고, 적절하게 줄타기하고 있다.
특히 이번 추석 명절 때는 손예진의 ‘스캔들’(넷플릭스)과 현빈의 ‘메이드 인 코리아2’(디즈니+)가 각각 유력 OTT에서 공개되면서 부부 대리전을 치르는 흥미로운 양상이 전개됐다.
“저희는 서로에게 가볍게 조언하지 않아요. 해당 작품에 대한 평가는 함께 작업한 감독님이나 동료 사이에서 가능한 이야기라고 서로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대해요. 이따금 힘든 장면을 찍은 후 ‘힘들었다’고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죠. 서로의 일과 작품을 존중하는 저희들의 방식이에요.”
손예진은 ‘버라이어티’로 또 다른 장을 연다. K팝 산업을 둘러싼 인간군상과 욕망의 충돌을 그려낸 작품에서 그는 한국 최고의 아이돌 그룹을 제작한 기획사 대표로 분한다. 육두문자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라고 제작 관계자는 살짝 귀띔했다. 또 한번 손예진이 새 얼굴을 갈아치울 채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대본은 배우에게 변신할 기회를 주기 때문에 항상 좋은 대본을 선택하려고 고민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죠. 그래서 지금은 ‘다작’보다는 제 안에 경험과 에너지를 잘 축적해서 어렵더라도 도전하고 싶은 좋은 배역들을 통해 계속 ‘성장’하는 데 신경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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