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방부는 ‘1260H 목록’을 관리한다. 국방수권법에 따라 지정하는 중국군사기업 명단이다. 명단에 오른 기업은 미 국방부와 직간접적으로 계약이 금지된다. 사실상 블랙리스트다. 지난 6월 공개된 최신 목록에는 중국의 대표 D램 기업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포함됐다.
그런데 글로벌 메모리 산업을 주도하는 한국으로서는 황당한 소식이 들려왔다. 애플이 미 정부에 CXMT D램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AI 붐으로 메모리 품귀 현상이 발생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메모리 빅3’가 AI용 고성능 제품에 집중하면서 범용 D램 부족도 심해졌다. 메모리 가격 상승이 완제품 가격까지 밀어올리는 ‘칩플레이션’이 애플을 움직였다. 빅3와의 가격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카드라는 분석도 있지만, 애플이 자사 제품에 CXMT D램을 테스트한 만큼 단순한 협상 카드용 엄포로만 보기도 어렵다.
칩플레이션 속 중국칩 찾는 애플
트럼프의 대중 견제·협상 카드로
허용 땐 CXMT 부상, 한국 타격
‘안미경미’ 의존 외교 한계 드러내
문제는 미 정부의 선택이다. 중국과 전략 경쟁 중인 미국이 이를 허용한다면 스스로 구축해온 대중국 반도체 포위망에 구멍을 내는 셈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8월13일 “훌륭한 미국 기업들이 중국산 메모리를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공화·민주 양당 의원 7명도 8월17일 애플에 서한을 보내 CXMT 메모리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결정권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백악관은 “국가안보를 보호하는 동시에 경제적 지원을 추진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밝혔다. 애플은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에게 중국산 D램을 사용하면 미국 소비자의 가격 부담을 낮출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은 트럼프를 상대로 노골적으로 로비를 벌여왔다. 지난해 8월 당시 팀 쿡 CEO가 트럼프에게 24캐럿 금 받침대가 포함된 기념품을 선물했다. 이런 가운데 9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CXMT 문제가 협상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중국 언론은 벌써 애플의 CXMT 채택 가능성을 거론하며 미·중 정상회담에서 돌파구가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를 내놓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남의 일이 아니다. CXMT가 생산 능력을 확대해 중국 내수시장만 잠식해도 한국 기업에는 타격이다. 올 상반기 한국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 본토와 홍콩이 차지하는 비중은 45%에 달한다. 여기에 애플 공급망까지 진입한다면 CXMT는 단숨에 글로벌 시장으로 도약할 발판을 얻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이 사안이 보여주는 세계 질서의 변화다. 중국의 급부상으로 ‘안미경중’ 시대는 끝났다. 한·중도 산업적으로 서로 보완하던 관계에서 제조업 전반에서 경쟁하는 관계로 바뀌었다. 이에 안보뿐 아니라 경제에서도 미국과 밀착하는 ‘안미경미’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한국이 기대했던 ‘안미경미’의 미국과도 다르다. 미국은 동맹과 공급망을 가치와 규범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자국의 물가와 기업 이익, 선거에 도움이 된다면 어제 만든 대중국 견제 원칙도 오늘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다. 애플의 CXMT D램 사용 요구는 미국의 대중국 견제가 곧 한국 기업의 안전망이라는 믿음 역시 언제든 깨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트럼프의 일방적인 한·미 연합훈련 축소와 애플의 중국산 D램 사용 요구가 던지는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같다. 안보든 경제든 어느 한 나라에 운명을 맡기는 전략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한·미 동맹을 가볍게 여기거나 중국과 다시 밀착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동맹도 결국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식한 상태에서 전략을 출발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기존의 안보·경제 문법이 무너지는 시대에 한국이 기댈 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협상력뿐이다. 미국도 중국도 한국을 쉽게 우회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그것이 ‘안미경중’도 ‘안미경미’도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시대에 한국이 확보해야 할 생존 전략이다.
강병한 정치부장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