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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쓰레기 없는 마라톤' 1000명이 보여준 희망

4월 현재 네이버 포털에 일정이 공개된 국내 마라톤 대회는 120여 개에 달한다. 특히 서울(동아)마라톤, 춘천마라톤, JTBC서울마라톤 등 국내 3대 메이저 대회는 매년 각각 수만 명의 참가자를 불러 모은다. 지난달 15일...

'쓰레기 없는 마라톤' 1000명이 보여준 희망

[단비현장] 재사용·재활용 가능성 재확인한 ‘2026 무해런’

지난 5일 오전 8시 20분쯤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생태공원 내 평화광장. 빗방울 이 10여 분 툭툭 떨어진 흐린 날씨에도 반팔, 반바지, 운동모자 등 가벼운 차림의 남녀노소가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갈색 판지를 잘라 만든 배번표를 가슴에 달고, 다회용 기록칩인 ‘찍찍이’로 발목을 감은 뒤 출발선 앞으로 다가갔다. 오전 9시, 주최자인 ‘지구닦는사람들’(wiperth)의 황승용(40) 대표가 “오, 사, 삼, 이, 일, 출발~”을 외치자, 1000여 명이 일제히 환호하며 뜀박질을 시작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열린 ‘무해런’, 즉 지구에 해가 되지 않는 달리기의 출발 모습이다.

배번표는 갈색 판지, 기록칩은 다회용 ‘찍찍이’

출발 신호가 울리자, ‘2026 무해런’ 참가자들이 환호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가슴에는 갈색 판지를 잘라 만든 배번표를, 발목에는 다회용 기록칩인 ‘찍찍이’를 부착했다. 이준기 기자

참가자들은 평화광장을 나와 보행로를 타고 하늘공원 방향으로 달렸다. 구간마다 재활용 판지에 글자와 그림을 넣어 만든 입간판이 반겨주었다. 입간판에는 호랑나비나 붉은머리오목눈이 등 노을공원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지난해 무해런은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렸으나, 올해는 쓰레기 매립지였던 상암동 생태공원을 선택해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참가자는 지난해 550명에서 두 배 규모로 늘었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4km 지점, 반환점을 앞둔 곳에 급수대가 설치돼 있었다. 참가자들은 자원봉사자들이 미리 다회용 컵에 따라둔 물을 마신 뒤, 길이 2.2m, 너비 1.5m가량의 파란색 간이 수영장 안에 컵을 던졌다. 달리기 구간 어디에도 바닥에 버려진 종이컵은 없었다. 노을공원으로 이어진 오르막 구간 곳곳에는 노란 개나리 등 봄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다른 마라톤 대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찌그러진 일회용 컵도, 버려진 현수막이나 우비도 없어, 참가자들은 상쾌한 기분으로 달릴 수 있었다.

‘2026 무해런’ 참가자들이 급수대를 통과하며, 사용한 다회용 컵을 간이 수영장에 반납하고 있다. 한동윤 PD

달리기 동호회인 트래블러닝크루(TRC)의 회원 6명은 개구리 복장 등 독특한 차림으로 달려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개인 물병에 물을 담아서 달렸고, 손이나 집게로 쓰레기를 주워 주머니와 쓰레기봉투에 담는 플로깅(달리며 쓰레기 줍기)도 실천했다. 크루원 김태희(33) 씨는 "항상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쓰레기가 나오는 것이 러너로서 마음에 걸렸는데, 쓰레기 없는 마라톤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달리기 동호회인 트래블러닝크루(TRC) 회원들이 각자 들고 온 개인 물병, 컵과 쓰레기 수거 장비 등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준기 기자

배번표 접어 꽃 모양으로 제작한 완주 메달

마침내 10km를 완주한 참가자들은 광장 한편에 삼삼오오 모여 ‘완주 메달’을 만들었다. 각자의 배번표를 여러 번 접어 방사형 꽃 모양의 기념 메달을 만드는 것인데, 주최 측이 큐알(QR) 코드를 통해 만드는 법을 미리 안내했다. 금속 재질 메달을 기념품으로 나눠 주는 일반 마라톤 대회와 비교되는 풍경이었다.

‘2026 무해런’의 한 참가자가 배번표를 접어 만든 완주 메달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준기 기자

참가자들은 또 광장 바닥에 모여 앉아 무가당 두유와 코코넛 오일로 만든 비건(완전 채식) 도넛과 콩나물, 당근, 상추 등이 듬뿍 들어간 비건 비빔밥을 먹었다. 그릇은 다회용기였다. 참가자 박미리(31) 씨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제공한다는 점이 대회 취지와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4월 현재 네이버 포털에 일정이 공개된 국내 마라톤 대회는 120여 개에 달한다. 특히 서울(동아)마라톤, 춘천마라톤, JTBC서울마라톤 등 국내 3대 메이저 대회는 매년 각각 수만 명의 참가자를 불러 모은다. 지난달 15일 열린 ‘2026 서울마라톤 겸 제96회 동아마라톤’에는 4만여 명이 참가했다. 이 3대 마라톤 대회에서 버려지는 일회용 컵만 최소 20만 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구닦는사람들의 황 대표는 “3만~4만 명 규모 대회의 경우 급수대 약 8곳 등에 4만 5천여 개의 컵이 비치되고, 배송박스와 리워드 쓰레기, 배번표, 비닐봉지 등을 모두 합치면 쓰레기가 100만 개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2020년 3월 설립된 지구닦는사람들은 플로깅, 꽁초어택(담배꽁초 수거 후 담배 제조사에 전달), 무해런 달리기 모임 등을 하고 있다. 이 단체는 2023년 강동구육상연맹이 주최한 선사마라톤대회와 JTBC 주최 마라톤에서 다회용컵 급수대를 설치·운영해 본 뒤 ‘직접 쓰레기 없는 마라콘을 운영해 보겠다’는 결심으로 2025년 무해런 행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마라톤 대회에서 쓰레기를 줄이도록 권고하는 뚜렷한 지침은 없다. 지난 1월 서울시가 ‘서울시 주최·후원 마라톤 대회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지만, 총 12개 항목에서 환경 관련 지침은 7번 ‘도로 위 쓰레기의 신속한 수거’가 유일했다. 지구닦는사람들은 마라톤 문화 개선을 위해 지난해 55페이지 분량의 ‘무해런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지구닦는사람들이 ‘2026 무해런’에서 재활용품을 이용해 꾸민 포토존. 이준기 기자

베를린·쇼난 마라톤은 선구적인 시도 중

전통 있는 국제 마라톤 대회들도 쓰레기 감축을 고민하고 있다. 전 세계 160개국에서 8만여 명이 참여하는, 세계 7대 마라톤 중 하나인 독일 베를린마라톤은 참가자에게 다회용 컵이나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든 일회용 컵을 제공한다. 다회용 컵은 수거 후 세척해서 재사용하고, 일회용 컵은 수거한 뒤 공정 처리를 거쳐 재활용한다. 베를린마라톤 홈페이지의 ‘지속가능성 보고서 2024’에 따르면, 이 마라톤은 24년도에 약 125만 개(3360kg)의 일회용 컵을 재활용했고, 91%의 다회용 컵을 재사용했다. 베를린마라톤은 배낭 안에 넣고 호스로 물을 마실 수 있는 수분 공급 주머니인 ‘하이드레이션 팩’을 가지고 온 참가자를 위해 15개의 리필 스테이션도 운영한다.

베를린 마라톤 참가자들이 쓰레기 수거함에 재활용 컵을 버리고 있다. 출처 베를린 하프 마라톤 잡지

마라톤 행사에서는 우비(비옷)가 쓰레기로 버려지는 문제도 심각하다. 마라톤은 주로 봄과 가을의 아침 시간에 개최되는데, 쌀쌀한 날씨에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일회용 우비를 입었다가 대회가 시작되면 버리는 참가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베를린마라톤은 2022년부터 참가자에게 지급되는 체온 유지용 일회용 담요를 수거해 재활용하고 있다. 2024년 대회에서는 일회용 담요 293kg이 재활용됐다. 반면 국내 마라톤 행사에서는 해마다 많은 양의 우비 쓰레기가 방치되고 있다.

지난 3월 서울(동아)마라톤 구간에 쓰고 버려진 체온 유지용 은박담요가 쌓여있다. 한동윤 PD

일본 도쿄 남쪽의 해안가를 따라 달리는 쇼난국제마라톤은 세계 최초로 일회용 컵과 플라스틱병을 배출하지 않기로 한 대회다. 2022년부터 참가자들이 모두 각자의 물컵 혹은 물병을 들고 오도록 하는 ‘나의 컵·나의 물병’(My Cup, My Bottle)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주최 측은 참가자들이 물을 받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총 200개의 급수대를 200m마다 운영한다. ‘나의 컵·나의 물병’ 정책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2019년 1만 1495kg이었던 쓰레기가 2025년에는 2274kg으로 줄었다. 주최 측이 참가자 4000여 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 95.5%가 이 정책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쇼난마라톤의 참가자가 급수대에서 개인 물병에 물을 받고 있다. 쇼난마라톤 인스타그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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