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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시론] 당신이 사라진 세계

홍보성 메시지를 제외하더라도 거의 모든 소통이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서 이뤄진다. 첫째 차에 메시지를 읽어주는 기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웃었던 적이 있다. 핸즈프리로 통화가 가능한 요즘, 그럴 거라면 그냥...

[시론] 당신이 사라진 세계

박기수 한양대 ERICA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문화콘텐츠전략연구소 소장)

박기수 한양대 ERICA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문화콘텐츠전략연구소 소장)

하루 종일 SNS 메시지의 홍수다. 알림 설정을 꺼보지만 그렇다고 메시지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어서 휴대폰을 켤 때마다 수십 개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홍보성 메시지를 제외하더라도 거의 모든 소통이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서 이뤄진다. 첫째 차에 메시지를 읽어주는 기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웃었던 적이 있다. 핸즈프리로 통화가 가능한 요즘, 그럴 거라면 그냥 통화하면 되지 않냐고 하니 메시지는 메시지도 통화는 통화란다. 이 말에는 메시지와 통화의 상활별 쓰임새가 다르다는 의미 말고도, 통화를 가급적 꺼리는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낯선 사람과의 대면은 물론 아는 사람과의 일대일 대화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이런 현상은 일종의 코쿤화(Cocooning)이다. 이런 현상은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사회적 유대감이 사라진 상황에서 거대 미디어와 빅데이터의 보이지 않는 파놉티콘(Panopticon)이 요구하는 서열과 경쟁 시스템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심리적, 물리적 방어막을 치는 일종의 방어 기제라 할 수 있다.

보면서 동시에 보여지는 SNS의 폭주와 향유자이면서 언제든 생산자로 참여할 수 있는 유튜브의 압도 그리고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상호 소통이 절대 미덕이 된 최근의 미디어 환경에서 정작 ‘자신’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다. 다시 말해, SNS 중심 소통을 통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인정투쟁에만 머물고, 유튜브라는 창을 통해 타인의 삶의 관찰자 혹은 평가자가 되려는 성향이 두드러지면서 정작 주체로서의 자신의 삶은 소거된다. 소통 과정에서 자기 삶의 소거는 개인이 주도적으로 수행해야 할 자기 삶의 성찰, 감정적 판단, 가치 판단의 과정을 SNS, 인플루언서, 데이터, 알고리즘 등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자아 외주화’(Outsourcing of Self) 라는 기괴한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자기 왜곡은 파편화된 자아를 만들거나 디지털 나르시즘에 갇히게 한다.

사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자기 성찰이 누락된 상태에서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비판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성찰해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타인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사실에 대한 종합적인 파악이나 전후 맥락은 물론 지금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의 진실성에 대한 검증도 없이 비판은 일방적이고, 집단화되어 더욱 가혹하다. 이쯤 되면 비판이라기보다는 집단 폭력에 가까워진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 산다>, <전지적 참견시점>, <슈퍼맨이 돌아왔다>,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와 같은 관찰 예능이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현실과는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자기 중심의 비판과 평가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방식이다. 온라인 상에서 보편화된 댓글을 통한 평가와 비판이 이제는 콘텐츠의 일부가 되면서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가혹한 평가와 비판이 이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비판 대상과 자신을 이격(離隔)시킴으로써 얻게 되는 상대적인 도덕적 우위는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을 방해한다. 관찰예능이든 댓글이든 간에 어디에도 내적 성찰을 내재화한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사이버렉카와 같은 자의적인 과잉 평가가 일상화되고 병리적인 현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SNS나 유튜브와 같은 공간은 보여지는, 보여주는, 보고 있는과 같은 다양한 시선이 무질서하게 혼재하는 곳이기에 고정된 관점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재미라는 명분으로 연출과 편집을 통해 의도적인 왜곡이 가능하기에 반드시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타인과의 직접 소통이 어렵다고 호소하며, 각자의 코쿤 속에서 안전한 소통만을 기대하는 ‘지금 이곳’에서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 되물어야 할 시점이다. 모든 소통은 내적 성찰을 전제로 한 자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한국대학신문>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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