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광 대구경북소비자연맹 정책실장
조선은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숭문천무(崇文賤武)가 체질화되면서 국방을 늘 뒷전으로 미루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고도 물리적 힘의 중요성을 망각한 대가는 혹독했다. 19세기 말, 거대한 제국주의 폭풍우가 몰아쳐서야 생존을 위한 근대식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무관학교를 세웠으나, 일제의 야욕을 돌려세우기엔 너무 늦은 국가적 각성일 뿐이었다.
물론 조선 후기 영·정조대의 장용영 설치나 훈련도감 개편 등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다각적인 노력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국가 전체의 구조적 모순과 경제적 붕괴, 그리고 세도정치기의 삼정 문란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 불행한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한국 사회는 화려한 문화·경제적 성취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안보 최전선을 지키는 이들에 대한 예우에는 인색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이 헌법에 따라 선출된 권력에 의한 문민통제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문민통제란 군을 정치적으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군이 오직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하도록 법과 제도적 틀 안에서 지원하며, 그 전문성과 자율성을 온전히 보장하는 데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정치는 안보라는 전문 영역마저 정권의 이해득실에 따라 재단하며, 정략적 간섭과 군 경멸을 일삼고 있다. 이러한 부당한 개입은 민주적 통제의 이름으로 둔갑한 현대판 '숭문천무'에 다름 아니다. 군의 사기와 전문성을 짓밟는 정략적 접근은 결국 국가 안보의 근간을 뒤흔드는 독소로 작용하게 된다.
정부와 여당의 안보 불감증은 선거철마다 표심을 잡기 위해 불거지는 '육사 지방 이전 및 삼군사관학교 통합 논란'과 '태릉골프장 부지 아파트 개발 계획'에서 극에 달한다. 육사 생도들이 6·25 전쟁 당시 목숨 바쳐 사수했던 호국의 성지이자 군사 요충지를 안보적 합리성 없이 오직 여당의 선거 전략과 부동산 개발 논리로 흔드는 행태는 폭거에 가깝다. 이는 정부가 군을 국가 안보의 보루가 아닌, 언제든 정치적 필요에 따라 동원하고 소모할 수 있는 '부동산 개발 부지' 정도로 취급하는 천박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국방을 책임져야 할 정치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와 검증 부실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과거 국회 국방위원회 등 안보 핵심 요직을 거친 이들조차 병역 및 군 규율과 관련해 구설수에 오르거나 특권의식을 드러냈던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청년 장병들에게는 서슬 퍼런 군법과 국방의 의무를 강요하면서, 정작 안보 사령탑에 앉아야 할 고위 정치인의 책임의식 부재를 방치해 온 정치권의 이중성은 군부 전체에 깊은 모멸감을 안겼다. 군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들의 특권 아래 두려는 정치권의 행태는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결정적 요인이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경멸의 대가는 결국 '장교 양성 체계의 붕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최근 학군단(ROTC)의 사상 초유의 미달 사태와 초급간부 확보 위기는 군의 허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병사 처우 개선이라는 대중 영합적 과제에만 치중한 나머지, 초급 장교들에 대한 경제적 처우와 사회적 예우는 방치한 결과다. 청년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만을 강요하다 위기가 오자, 정부는 근본적인 대책 대신 '삼군사관학교 통합을 통한 숫자 맞추기'식 미봉책으로 대응하려 하고 있다. 정예 장교를 길러내지 못하는 군대가 어떻게 국가를 지키겠는가.
상무(尙武)정신은 전쟁을 숭배하는 호전성이 아니라, 공동체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책임을 다하고 또한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를 기꺼이 던지는 최고 수준의 시민의식을 말한다. 정치가 군을 존중하고, 군이 정치적 외풍이나 경제적 박탈감에서 벗어나 오직 국방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상무정신의 토대다. 학문을 존중하는 '숭문'이 국가의 지성과 품격을 키운다면, 군대를 예우하는 '상무'는 그 품격을 지켜내는 단단한 성벽이 된다. 문과 무, 정치와 군대는 대립하고 척결해야 할 이분법적 대상이 아니라, 국가라는 지붕을 지탱하는 두 개의 단단한 기둥인 셈이다.
평화는 구걸하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으며, 주권은 화려한 문화와 경제력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또한 군의 정치적 중립은 군인들만의 의무가 아니라 정치권 역시 군을 정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고 스스로 절제할 때 비로소 유지된다. 정치논리에 휩쓸려 육사의 역사성을 지우는 개발 행위를 즉각 멈추고, 지도층부터 군의 규율을 존중하며, 장교단의 붕괴를 막아낼 진정성 있는 국가적 예우를 복원해야 한다. 제복의 명예를 존중하는 상무정신이 사회적 공기로 자리 잡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뒤늦은 자각의 눈물을 흘리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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