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식장학회, 전북출신 대학생 초청 역사탐방 걸어서 독립운동 속으로’ 실시
만리동 고개에 붉은 벽돌 건물이 한 채 서 있다.
옛 양정고등보통학교 본관으로 지금의 손기정기념관이다.
지난 18일 오후 전북 출신의 대학생 열일곱 명이 그 앞에 섰다.
사단법인 신지식장학회(이사장 김홍규)가 주관하는 역사문화 아카데미 2기 ‘제26차 신지식 장학생 선발’ 프로그램, ‘걸어서 독립운동 속으로’ 10부작의 여섯 번째 걸음이다.
장학회에서 김세용 국장, 황세현 장학위원이 동행했다.
90년여 전 이 학교에 한 소년이 다녔다. 신의주에서 올라온 가난한 집 학생이였다. 달리기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다.
1936년 8월 9일, 그는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했다.
우승은 했으나 시상대 위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가슴의 일장기를 부상으로 받은 참나무 묘목으로 가렸다.
이긴 사람이 고개를 드는 대신 가릴 것을 찾아야 했던 순간이다.
그 묘목은 사진에 찍혔고, 그해 8월 25일 동아일보는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다.
사진 한 장에서 깃발 하나를 지운 일로 신문은 아홉 달을 멈췄고 기자들은 끌려갔다.
“생은 반환점 없는 마라톤이라 할 수 있다” 되돌릴 수 없으니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손기정님의 말씀이다.
반환점이 없다는 것은 잘못 달린 구간을 다시 달릴 수 없다는 뜻이다.
기념관을 나와 왼편으로 체육공원 한쪽에 커다란 바위 시비가 하나 서 있다. 심훈의 오오, 조선의 남아여!
1936년 8월 10일 새벽, 손기정의 우승을 알리는 신문 호외를 받아 든 그는 그 종이 뒷면에 붓을 달렸다.
한 달 남짓 뒤 그는 세상을 떠났고, 이 시가 마지막 작품이 됐다.
심훈은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던 사람이다.
학생들이 지난 2차 탐방에서 걸었던 바로 그 옥사다.
친필 원고는 지난 8월 광복절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일행은 만리동 좁은 마을길을 따라 걸었다.
약현성당
언덕 위에 있는 약현성당은 1892년에 건축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벽돌 성당이다. 첨탑이 하늘을 찌르고 장미창이 서쪽 빛을 받는다.
조선 땅에 서양식 벽돌로 지은 집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성당앞쪽 십자가의 길 계단을 내려오면 성요셉아파트가 나온다.
1971년에 성당에서 신자들을 위해 지은 주상복합 아파트다. 경사진 땅을 그대로 받아 아래쪽은 여섯 층, 위로 갈수록 낮아져 맨 위는 세 층으로 끝난다. 길이 휘면 건물도 휜다. 땅을 깎은 것이 아니라 건물이 땅을 따라갔다.
땅에 순응했기 때문에 좋은 집이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있다.
오래된 방앗간의 참기를 향기가 바람을 타고 구수하게 다가왔다.
언덕을 지나 충정로에 닿으면 대로변에 녹색으로된 충정아파트가 서있다. 1937년 일본인 도요타 다네오가 지어 도요타아파트로 불리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수세식 화장실과 난방까지 갖춘 당시로는 최신 주거였다.
1979년 도로를 넓히면서 건물의 삼분의 일이 잘려나갔고, 잘린 단면이 지금도 그대로 보인다.
학생들은 건물의 보존과 개발의 양면성으로 이야기를 옮겼다.
충정로의 옛 이름은 죽첨정(竹添町)이었다. 갑신정변 때 일본공사였던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성을 딴 것이다.
침략자의 이름이 길이 되어 사십 년을 버텼다. 해방이 되고서야 충정공 민영환의 시호를 따 지금의 충정로가 됐다.
을사늑약에 분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사람이다.
이름 하나 되찾는 데 사십 년이 걸렸다.
저녁은 큰 길가 골목안의 충정각에서 만찬을 했다.
1903년 무렵 지어진 붉은 벽돌 이층집으로, 대한제국 한성전기회사 기사장이 살던 집이다.
식민의 세월과 전쟁과 개발을 모두 견디고 백이십여 년을 버텼다. 마당의 오래된 나무 아래 모여 사진을 찍었다.
뒤로 고층 빌딩의 불빛이 솟아 있었다. 공간과 시간이 한 화면에 들어왔다.
1892년 성당에서 1971년 아파트까지 다시 1903년의 벽돌집이다.
2차는 주변의 치맥집으로 자리를 옮겨 치킨과 맥주를 앞에 놓고 역사의 뒷애기로 마무리했다.
이날 백승기 이사는 역사의 관점에서 대 학생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왜 1910년부터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르는가.”
모두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는 더 물었다.
그 시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엄연히 있었으니 우리는 임시정부시대라 부를 수는 없는가.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이 있었으니 항일독립투쟁기라 부르는 주체적 사고는 왜 하지 못하는가.
고려는 몽골에 맞선 시절을 대몽항쟁기라 불렀는데 그 패기는 어디로 갔는가.
“누가 지배했는가로 시대를 부르면 그 시대의 주인은 지배자가 된다”며 “무엇을 했는가로 부르면 주인은 싸운 사람들이 된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라 부르는 순간 문장의 주어는 일제가 되고 우리는 목적어가 된다는 것이다.
부르는 이름은 위에서 정해지지 않는다. 동학민란이 농학농민운동이 되고 다시 동학농민혁명이 되었다.
군사정권이 부른 광주사태도 5·18민주화운동이 된 것은 학계가 먼저 선포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늘어나 호칭이 뒤따라온 것이다. 일제시대가 일제강점기로 바뀐 것도 이십여 년 전 일이다.
누군가 먼저 시작하고 그렇게 불러야 역사가 바뀐다.
죽첨정이 충정로가 되는 데 걸린 사십 년도 저절로 흐른 것이 아니다.
누군가 그 이름을 참지 못했기 때문에 흐른 것이다.
백 이사는 국권을 빼앗긴 36년을 “나는 이제 항일독립투쟁기라 부르려 한다”고 했다. 침략의 불법성을 흐리자는 말이 아니라고 그는 덧붙였다.
강점은 분명한 사실이고 강제 병합조약은 무효라는 것이다.
다만 그 시대를 이야기할 때 문장의 주어를 바꾸자는 것이다.
빼앗긴 사람들의 시대가 아니라 강자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시대로 부르자는 것이다.
손기정 선생은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였지만 묘목으로 가슴을 가렸다.
심훈은 호외 뒷면에 시를 썼다.
고개를 숙인 것이 그들의 시대가 아니라 가리고 쓴 것이 그들의 시대라는 말이었다.
학생들은 탐방을 마치면 탐방기를 쓴다. 조선의 사관이 그날의 일을 적어 남기듯, 자기 이름을 걸고 뱅기노자 광장 ‘신지식 청년사관’란에 글을 남긴다.
참가한 학생들에게 당부를 남겼다.
우리는 그 시기를 무엇이라 부를지 한 번만 깊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라 써도 좋고 항일독립투쟁기라 불러도 좋다. 다만 이제 역사를 국민사관의 눈으로 주체적 사고로서 고민해 보자는 것이었다.
청년들이 자기 이름으로 시대의 이름을 정한는 일. 그것이 국민사관의 첫걸음이라고 그는 말했다.
“생은 반환점 없는 마라톤이라고 손기정은 말했다. 시대의 이름도 그렇다”며 “지금 부르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그대로 받아 적는다”고 말했다.
7차 탐방은 다음 달 2일 서울 효창공원에서 ‘독립운동가 묘역, 기억의 공간’을 주제로 열린다.
신지식장학회는 2회 이상 참여자에게 선발 자격을 부여해 20명의 장학생을 선발한다.
탐방 프로그램은 전북도민일보, ㈜아신, 한켠역사문화포럼, 마리힌웨딩이 후원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