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계신총회) 이천 덕평교회 담임목사 석진태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AI가 하루에 쏟아내는 데이터의 양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기록해 온 모든 문명을 가뿐히 뛰어넘습니다. 클릭 한 번이면 세상 모든 지식이 눈앞에 펼쳐지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마음의 빈곤을 느낍니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진짜 진실은 더 찾기 어려워지고, 지식이 넘칠수록 삶의 지혜는 더 귀해집니다. 데이터가 쏟아질수록 사람들은 더 혼란스러워합니다.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는 시대,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정직한 모습입니다.
*자기포장이라는 인류의 오래된 유혹
AI 시대의 역설은 정보가 너무 많아져서 오히려 무엇이 진짜인지 판단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는 데 있습니다. 진짜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영상이 실제 뉴스보다 더 빠르게 퍼지고, 알고리즘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며 내가 세상 전부를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사실 가짜가 진짜를 흉내 내는 것은 인류의 오래된 비극이지만, 지금은 그 양상이 다릅니다. 가짜가 너무나 정교해서, 이제는 진짜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오히려 가짜의 기술을 빌려야 하는 기괴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포장 충동은 사실 타락의 역사와 그 시작을 같이합니다. 성경 중 첫번째 책인 창세기를 보면, 금지된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벗은 모습을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자기포장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서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대신, 그들은 무화과 잎 뒤로 숨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식물의 잎은 금방 시들기 마련입니다. 당장은 가려주는 것 같아도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말라 비틀어집니다. 우리 시대가 자랑하는 화려한 이미지나 정교한 데이터 역시 결국 시들어버릴 무화과 잎과 다르지 않습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 길목에서 예수님이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 앞에 멈춰 서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스라엘의 무화과는 잎이 무성해질 때 반드시 첫 열매가 함께 열려야 합니다.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내게 열매가 있습니다"라는 시각적인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나무를 꾸짖으신 것은 단순히 식물에게 화를 내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 겉으로만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과 형식만 남은 종교, 즉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비어 있는 위선을 향한 엄중한 경고였습니다.
*비어있는 상자와 조용히 익어가는 열매
이러한 위선은 우리 일상에서도 반복됩니다. 설 연휴가 지나면 매년 어김없이 나오는 선물 세트의 과대포장 뉴스가 좋은 예입니다. 화려한 상자를 열면 텅 빈 공간과 충전재만 가득하고, 실제 내용물은 초라할 정도로 작습니다. 매년 개선하겠다고 말하지만 다음 해가 되면 우리는 또 똑같은 뉴스를 봅니다. 포장은 해마다 더 정교해지는데 알맹이는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이 모습은 우리 사회의 변하지 않는 단면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SNS에 행복한 순간만 골라 전시하고, 기업은 실력보다 이미지를 만드는 데 집중하며, 정치인들은 정책보다 말을 꾸미는 데 힘을 쏟습니다.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간격이 이토록 넓어진 적이 있었을까요.
그 간격을 메우는 것은 더 많은 정보나 기술이 아닙니다. 잎사귀 아래 실제로 무엇이 달려 있는가 하는 진실의 무게입니다. 무화과나무 이야기에는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었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마가복음 11:12-14). 철이 아닌데 열매를 찾으신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진짜 모습은 여건이 다 갖춰진 다음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더 준비되면 잘하겠다"는 말은 종종 "영원히 하지 않겠다"는 말의 핑계일 때가 많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결정적 순간은 우리의 사정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농부들은 조생종 열매를 '파기'라고 불렀습니다. 당도 높은 본열매에 비하면 보잘것 없었지만, 그것은 길 잃은 나그네의 허기를 달래주는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눈부신 성공이 아닙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낸 정직한 약속,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한결같이 행동하는 성실함. 이것들이 화려한 잎사귀 아래 숨겨진, 세상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열매입니다. 정교한 AI는 결코 만들어내지 못하는, 오직 사람의 내면에서만 자라나는 생명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사람은 화려한 사람이 아닙니다. 말없이 곁에 있어준 사람, 손해를 보면서도 약속을 지킨 사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한결같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서는 무언가 향기 같은 것이 났습니다. 잎은 눈에 잘 띄지만, 열매는 조용히 익습니다. 데이터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 시대에, 어쩌면 가장 희귀하고 소중한 것은 바로 그 조용히 익어가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잎만 무성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멋진 포장지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맺는 진짜 열매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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