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03 AI 휴머노이드 로봇이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피겨 AI
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물류 라인 앞에 섰다. 컨베이어 위로 흘러오는 소형 택배 상자를 집어 들고, 바코드가 아래로 향하도록 방향을 맞춘 뒤 다시 라인에 올렸다. 몇 분짜리 시연이 아니다. 로봇은 30시간 넘게 분류 작업(19일 0시께, 약 118시간 경과)을 이어갔고, 3만 개 이상의 물품을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공지능(AI)이 글을 쓰고 이미지를 만드는 단계를 넘어 실제 현장에서 물건을 보고 판단하고 움직이는 ‘피지컬 AI’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다.
피지컬 AI는 물리적 세계에서 작동하는 AI를 뜻한다. 핵심은 로봇이다. 기존 산업용 로봇은 정해진 위치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데 강했다. 자동차 공장에서 용접하고, 반도체 라인에서 웨이퍼를 옮기고, 물류센터에서 정해진 경로를 따라 박스를 운반하는 식이었다. 반면 피지컬 AI가 지향하는 로봇은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사람의 언어 지시를 해석하고, 상황에 맞춰 행동을 조정한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VLA가 있다. VLA는 ‘비전 랭귀지 액션(Vision-Language-Action)’의 약자다. 시각과 언어, 행동을 하나로 연결하는 AI 모델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로봇이 카메라로 사물을 보고, 사람의 말을 이해한 뒤, 팔과 손, 다리로 실제 행동을 수행하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저 상자를 선반 위에 올려라”는 지시가 들어오면 로봇이 공간과 사물을 파악하고 동작으로 옮기는 구조다.
이전의 자동화가 ‘프로그래밍된 기계’에 가까웠다면, VLA 기반 피지컬 AI는 ‘학습하는 작업자’에 가깝다. 환경이 바뀌어도, 사물의 위치가 달라져도, 처음 보는 물체가 등장해도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글로벌 빅테크와 완성차 업체, 로봇 스타트업들이 일제히 이 분야로 뛰어들고 있다.
엔비디아 GR00T N1 휴머노이드 로봇 사진=엔비디아
엔비디아는 피지컬 AI 경쟁의 대표적 플랫폼 기업이다. 엔비디아 연구진은 휴머노이드 로봇을 위한 범용 파운데이션 모델 ‘GR00T N1’을 공개했다. 이 모델은 시각·언어 모듈이 주변 환경과 지시를 해석하고, 별도 동작 생성 모듈이 로봇의 움직임을 만드는 이중 구조를 갖췄다. 학습에는 실제 로봇 동작 데이터, 사람의 영상, 합성 데이터가 함께 활용됐다. AI 반도체에서 출발한 엔비디아가 로봇의 ‘두뇌’와 학습 인프라까지 장악하려는 이유다.
산업 리더들과 협력하여, 딥마인드는 앱트로닉(Apptronik)과 파트너십을 맺고 자사의 첨단 AI 모델을 휴머노이드 로봇에 통합하고 있다. 사진=제미나이 로보틱스
구글 딥마인드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는 ‘제미나이 로보틱스(Gemini Robotics)’를 통해 기존 대형언어모델의 멀티모달 능력을 로봇 행동으로 확장하고 있다. 이 모델은 시각과 언어를 기반으로 로봇을 직접 제어하는 VLA 모델로, 새로운 환경과 다양한 물체에 대응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디지털 공간에서 질문에 답하던 AI가 이제 현실 공간에서 물건을 잡고, 옮기고, 조작하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완성차 업계도 피지컬 AI 경쟁의 한복판에 있다. 자동차 공장은 반복 작업, 부품 이동, 조립, 검사, 물류가 결합된 대표적 제조 현장이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가장 먼저 검증될 가능성이 큰 이유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자회사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앞세우고 있다. 테슬라는 전기차와 자율주행에서 축적한 AI, 센서, 배터리, 제조 역량을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로 확장하려 하고 있다.
BMW도 휴머노이드 로봇을 제조 현장에 시험 투입한 대표 사례다. 미국 로봇 스타트업 피겨 AI는 BMW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공장과 협력해 자동차 생산 현장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활용 가능성을 시험해왔다. 산업용 로봇이 사람과 분리된 공간에서 움직였다면, 휴머노이드 로봇은 사람이 일하던 공간과 동선을 그대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최근 피겨 AI의 물류 시연이 주목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피겨 AI는 휴머노이드 로봇 F.03이 물류 라인에서 소형 택배 상자를 분류하는 모습을 라이브로 공개했다. 당초 목표는 8시간 연속 작업이었지만, 시연은 24시간을 넘겼고 이후 30시간 이상 이어졌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로봇은 온보드 카메라와 자체 소프트웨어 ‘헬릭스-02’를 기반으로 자율 작업을 수행했으며, 사람 작업자에 가까운 약 3초당 1개 처리 속도를 보인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이 장면은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택배 상자를 집어 방향을 맞추는 작업은 물류센터에서 흔한 반복 업무다. 로봇이 이 일을 장시간 해냈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동시에 동작 지연, 어색한 움직임, 바코드 방향 오류 가능성 등은 상용화까지 넘어야 할 벽도 드러냈다. 피지컬 AI 경쟁의 핵심은 ‘움직일 수 있느냐’가 아니라 ‘현장에서 오래, 정확하게, 경제적으로 일할 수 있느냐’로 초점이 맞춰진다.
국내에서도 피지컬 AI를 실험실 밖으로 끌어내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민관협력 기반 AI 휴머노이드 원천기술 고도화 사업’을 통해 2030년까지 한국형 AI 휴머노이드 플랫폼 확보에 나선다. 약 5년간 총 504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이다. KIST가 개발한 휴머노이드 ‘케이팩스(KAPEX)’가 기반 기술이다.
양성욱 KIST 책임연구원은 18일 서울 KIST 본원에서 열린 착수 회의에서 “일상에서 단순히 물건 집기만 하는 휴머노이드는 필요하지 않다”며 “하나의 동작을 하더라도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대응하는 휴머노이드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로봇이 특정 동작을 반복하는 것을 넘어, 실제 생활 속에서 스스로 학습하고 경험하는 모델을 지향한다는 설명이다.
연구 책임자인 이종원 KIST 휴머노이드연구단장은 국내 연구자와 기업들이 중국 유니트리(Unitree) G1 등 외산 플랫폼에 의존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믿고 사서 쓸 수 있는 고수준 K-휴머노이드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휴머노이드 경쟁이 단순 완제품 개발을 넘어 기술 주권과 산업 생태계 문제로 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KIST가 제시한 목표는 집단거주시설과 공공 실환경에서 2종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1개월 이상 자율적으로 연속 동작하는 휴머노이드 장기 실증이다. 예시 시나리오는 거주 공간 청소와 정리정돈, 쓰레기 분리수거, 병동 내 물품 배송 등이다. 피겨 AI가 물류 현장에서 30시간 넘는 분류 시연으로 주목받았다면, 한국형 휴머노이드 과제는 병원과 거주시설 같은 실제 생활 공간에서 장기간 안정성을 검증하는 방향에 가깝다.
제조는 LG전자가 맡는다. 사업단은 5년간 전신 휴머노이드 15대와 상체 휴머노이드 5대 제작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28년까지 AI와 하드웨어 등 요소기술을 통합하고, 2029년부터 한림대성심병원을 중심으로 본격 실증을 수행한다는 계획이다. 공공 연구기관의 원천기술과 대기업 제조 역량을 결합해 국내 휴머노이드 생태계를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안전 기준도 중요한 과제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움직인다. 팔을 뻗고, 물건을 들고, 복도를 이동한다. 산업용 로봇처럼 울타리 안에 고정해두기 어렵다. 이종원 단장은 휴머노이드에 특화된 안전 기준과 인증 절차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며, 2028년 제정 예정인 국제 안전규격 ISO 25785에 대응해 국내 안전 표준과 인증 체계를 선도하겠다고 밝혔다.
피지컬 AI가 주목받는 배경에는 산업 현장의 구조적 변화도 있다. 제조업과 물류업은 인력난과 고령화, 인건비 상승, 안전 문제를 동시에 겪고 있다. 고온·고압·고소 작업처럼 사람이 하기 위험한 일, 반복적이고 근골격계 부담이 큰 일, 숙련 인력 확보가 어려운 현장이 우선 적용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성 향상과 안전 확보가 명분이고, 장기적으로는 비용 절감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피지컬 AI가 곧바로 인간 노동자를 대체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실제 현장은 실험실보다 훨씬 복잡하다. 바닥 상태, 조명, 소음, 예외 상황, 작업자와의 협업, 고장 대응 등 변수가 많다. 로봇이 물건 하나를 집는 시연과 하루 8시간, 주 5일 동안 안정적으로 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한 달 이상 자율 동작을 목표로 내건 KIST 과제도 이 차이를 넘기 위한 실증에 가깝다.
기술적 과제도 남아 있다. 로봇이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려면 시각 인식뿐 아니라 촉각, 힘 조절, 균형, 경로 계획, 충돌 회피가 모두 맞물려야 한다. 특히 손은 가장 어려운 영역이다. 사람은 부품을 집을 때 무게와 표면, 미끄러움, 힘의 방향을 본능적으로 조절하지만 로봇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학습과 연산의 대상이다. VLA가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봇이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고 행동으로 연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자리 논쟁도 피하기 어렵다. 기업은 위험하고 반복적인 업무를 줄이고 근로자를 더 고부가가치 작업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현장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동화가 결국 고용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특히 제조업과 물류업은 대규모 고용을 떠받치는 산업이다. 로봇 도입은 기술 이슈를 넘어 노동, 교육, 산업정책의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 산업계에도 시사점은 크다. 한국은 자동차, 배터리, 반도체, 조선, 물류 등 피지컬 AI가 적용될 수 있는 제조 기반을 갖고 있다. 동시에 고령화와 생산인구 감소, 중소 제조업의 인력난이라는 구조적 문제도 안고 있다. 피지컬 AI는 로봇 몇 대를 들여오는 문제가 아니라 제조 현장의 데이터를 어떻게 모으고, 로봇을 어떻게 학습시키며, 사람과 기계가 함께 일하는 공정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의 문제로 제시된다. / 월요신문=육동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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