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DB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이 문을 열었지만 사건을 넘겨받을 전산 기반과 수사를 지휘할 인력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다. 검찰이 남긴 미제사건 18만여 건은 이관 일정조차 잡히지 않았고, 새로 접수된 사건을 놓고는 경찰과 중수청 중 누가 수사할지를 둘러싼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 수사·기소 분리를 위한 조직 개편 이후에도 실무 준비가 뒤따르지 못하면서 사건 처리 지연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공소청은 기존 검찰 미제사건 중 중수청에 이관할 사건의 분류 기준과 목록을 마련했다. 그러나 실제 사건을 넘기는 작업은 시작하지 못했다. 법적 유예기간 안에 수사를 마칠 수 있는지, 어느 기관의 수사 범위에 해당하는지에 따라 사건을 경찰과 중수청으로 나눠 보내야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전산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탓이다. 중수청 관계자는 “이관 협의는 시작했지만 시점과 방법 등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관을 기다리는 사건 규모도 상당하다. 공소청이 집계한 지난달 말 전국 검찰청 미제사건은 18만 6307건이다. 6월 말 14만 513건에서 석 달 사이 4만 5794건 증가했다. 공소청 검사에게 기존 사건을 직접 수사할 수 있도록 허용된 기간은 12월 30일까지다. 검사 인원이 줄어든 점 등을 감안하면 최소 10만 건 이상이 경찰이나 중수청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유예기간 종료 전까지 이관 체계를 정비하지 못할 경우 사건들이 수사기관 사이에서 대기하며 처리가 늦어질 수 있다.
사건을 넘기기 시작하더라도 기록 이전이 또 다른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중수청은 자체 전산화를 추진하는 동안 경찰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킥스)의 일부 기능을 이용하고 종이 기록도 함께 활용할 계획이다. 기관 간 전자기록 이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지난해 8월 이후 전자화한 기록을 다시 출력해야 할 가능성도 있다. 신규 고발 사건을 처리하면서 기존 미제사건까지 인수해야 하는 수사 인력이 기록 출력과 정리에 시간을 쏟게 되는 구조다.
새로 발생한 사건에서도 관할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드러나고 있다. 최근 국내 금융권을 동시다발적으로 겨냥한 ‘인공지능(AI) 해킹’ 사건이 대표적이다. 중수청법은 ‘국가핵심기반’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공격을 중수청 수사 범위에 포함하고 있다. 반면 경찰은 피해를 본 시중은행과 저축은행의 금융거래 시스템이 국가핵심기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금융위원회는 해당 사건이 중수청 관할에 속하는지를 두고 유권해석을 진행하고 있다. 법에 규정된 수사 범위를 실제 사건에 적용하는 단계부터 해석 문제가 발생한 셈이다.
경찰이 수사 중인 사건이 중수청에도 접수되면서 수사 주체를 정리해야 하는 사례도 생겼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올해 상반기 환자 4명이 숨진 인천 미추홀구 원병원 사건과 관련해 지난 6일 병원장을 중수청에 고발했다. 혐의는 업무상과실치사와 감금, 무면허 의료행위 지시 등이다. 인천경찰청 광역범죄수사대 역시 유가족의 고소를 받아 해당 사건을 수사하고 있으며, 인권위의 고발 당일 병원을 압수수색했다. 동일 사건이 두 기관에 접수되면서 중복 수사를 막기 위한 조율이 필요해졌다.
그러나 기관 간 관할 다툼을 조정할 공식 기구는 아직 가동되지 않고 있다. 개정 형사소송법에 담긴 수사권관할조정협의회는 내년 2월 출범한다. 그전까지는 경찰과 중수청이 사건마다 협의해 담당 기관을 정해야 한다. 협의가 길어지거나 역할 분담이 명확하지 않으면 중복 조사로 사건 관계자의 부담이 커지고 수사 일정도 지연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선 수사를 지휘할 간부들의 빈자리도 조직 안착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중수청 산하 최대 조직인 서울중수청은 6개 수사국에 속한 25개 과 중 11개 과의 과장이 공석이다. 전체 과장 자리의 44%가 비어 있는 것이다. 정원이 122명인 반독점수사국은 국장도 없는 상태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AI 해킹 사건이 중수청 통보 대상이라는 유권해석이 나오더라도 사이버정보 범죄 수사를 담당할 과장 자리조차 공석이어서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질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오는 14일 인사청문회를 앞둔 김지용 초대 중수청장 후보자는 지난 8일 청문회 준비 사무실에 처음 출근했다. 김 후보자는 “과거 검찰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표적수사, 먼지털기식 수사를 자행해 수많은 폐단이 발생했고, 급기야 검찰이 폐지에 이르게 된 작금의 상황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다”며 “부패·금융·화이트칼라 범죄 등에 대해서도 ‘네 편 내 편’ 없이 공정하게 수사해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