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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빛을 품은 한지, 미래를 빚는 재료로…이유라 교수의 ‘살아 있는 전승’

전통한지조형 분야 대한민국전통명장 인증을 받은 이유라 전주대학교 교수.

빛을 품은 한지, 미래를 빚는 재료로…이유라 교수의 ‘살아 있는 전승’

전통한지조형 분야 대한민국전통명장 인증을 받은 이유라 전주대학교 교수.

한옥마을 창호문 사이로 햇살이 들었다. 한지는 빛을 가로막지 않고 미세한 결 사이로 받아들여 부드럽게 흩어냈다. 이유라 전주대학교 교수에게 그 순간의 한지는 평면적인 바탕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유기체’였다.

이 교수는 “창호문을 통과한 빛 속의 한지는 스스로 빛을 품고 호흡하는 생명체처럼 다가왔다”며 “은은한 투광성과 자연스러운 질감에 깊이 매료됐다”고 말했다.

이 경험은 2001년 개인전 ‘연꽃 부채 그림전’과 이듬해 ‘실용한지 생활용품전’의 모태가 됐다. 이후 그는 전통 창살의 여백과 한지의 투광성을 결합한 조명으로 탐구를 이어갔다.

이유라 교수의 작품 왼쪽부터 ▲꿈속의 정원 ▲기억의 조각

▲ 빛에서 시작된 한지, 조형 재료로 거듭나다

산업디자인과 조형미술을 공부하며 금속·유리·플라스틱·세라믹을 다룬 이 교수는 인공 소재에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전주에서 다시 만난 닥섬유의 따뜻한 촉감과 질긴 성질이었다.

그는 “‘지천년 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라는 말처럼 한지는 부드러운 모습 안에 질긴 생명력을 품고 있다”며 “산업디자인의 기능성과 조형미술의 깊이를 결합하면 한국의 자연주의 미학을 세계에 전할 독창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배접과 문양 중심의 전통 방식으로는 자유로운 입체 표현에 한계가 있었다. 천연 염색 색지는 빛과 습도에 노출되면 색을 잃었고, 조명에 사용한 한지는 열과 습도 변화로 뒤틀리기도 했다. 학생들의 과감한 구상을 전통 색지·지호·지승공예만으로 구현하기도 어려웠다.

이 교수는 “한지가 보호하고 보존하는 대상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계속 쓰이려면 새로운 표현과 용도에 맞는 재료 연구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 고민 끝에 개발한 ‘닥섬유 칼라믹스’는 닥섬유의 질감과 질김을 살리면서 색채 안정성을 높인 조형 재료다. 점토처럼 빚어 부조와 입체·곡면을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개발 과정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젖은 반죽의 선명한 색은 건조 후 칙칙해졌고, 안료가 많으면 섬유가 굳거나 표면이 갈라졌다. 결합 재료가 부족하면 색가루가 손에 묻어났다.

그는 “닥섬유의 포근하고 숨 쉬는 질감을 지키면서 마른 뒤에도 원하는 색을 유지하는 배합을 찾기 위해 수년간 수백 번의 실험과 파기를 거듭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분쇄한 닥섬유와 삭힌 풀, 아교·해초액·천궁액·편백유 등으로 구성된 천연혼합액과 염액을 반죽하는 ‘닥섬유 컬러믹스의 제조방법’으로 2011년 특허를 등록했다. 같은 해 관련 논문도 발표했다.

그는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영구불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며 “기존 염색 한지의 급격한 탈색과 변색을 줄여 작품과 생활문화 상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수명을 늘렸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연구와 창작은 2018년 전통한지조형 분야 대한민국전통명장 인증으로 이어졌다. 앞서 2006년에는 한지공예와 한지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관광부 장관 공로상을 받았다.

이유라 교수 작품 'Resting Place(인식)'

▲ 향과 금속을 만나 생활로 들어온 한지

이 교수는 닥섬유가 향을 머금었다가 천천히 내보내는 성질에도 주목했다. 라벤더와 편백 등 자연의 향을 더해 한지를 눈뿐 아니라 손끝과 코로도 느끼는 공감각적 매체로 확장했다.

그는 “한지의 본질은 직접 만지고 느낄 때 비로소 완성된다”며 “닥섬유의 따뜻한 촉감에 자연의 향을 더해 시각과 촉각, 후각이 하나로 연결되는 경험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2010년 ‘아로마 테라피 닥섬유 칼라믹스 조형전’에서는 색과 향, 촉감이 결합한 작업을 선보였다. 이 교수는 이를 바쁜 일상 속 현대인에게 자연의 여유와 정서적 안식을 건네는 ‘공감각적 치유 매체’로 해석했다.

금속과의 결합도 도전이었다. 온·습도에 따라 팽창·수축하는 닥섬유는 은·동·스테인리스와 물성이 달랐다. 접합면이 들뜨거나 접착 성분이 스며들어 얼룩이 생겼고, 종이의 수분으로 금속이 산화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 교수는 충격과 온·습도 변화에 견디는 결합 방식과 표면 마감을 연구했다. 금속의 절제된 차가움과 닥섬유의 포근한 온기가 어울리도록 조형적 균형도 맞췄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는 한지를 가방과 장신구, 조명과 공간 오브제로 확장했다. 건축 내장재와 공간 장식, 금속·가죽을 결합한 패션·생활문화 상품도 탐구하고 있다. 질기고 가벼운 닥섬유에 현대적 디자인을 더해 지속 가능성과 한국적 정체성을 지닌 문화상품으로 발전시키려는 것이다.

이유라 교수 작품 '향기가 머무는 나의정원'

▲ 장인과 작가, ‘살아 있는 전승’을 함께 만들다

한지는 현재 ‘한지 제작의 전통 지식과 기술 및 문화적 실천’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심사를 받고 있다.

이 교수는 닥나무를 재배하고 껍질을 삶고 두드려 씻은 뒤 닥풀로 종이를 뜨는 과정에 자연과 함께 살아온 선조들의 지혜가 담겼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네스코 등재는 한지를 박물관에 박제하는 일이 아니라 기후위기 시대의 지속 가능한 친환경 문화로 선언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며 “무형유산은 과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재창조되는 살아 있는 전승”이라고 말했다.

신소재 개발도 그 연장선에 있다. 선조들이 한지로 창호·장판·그릇을 만들었듯 오늘의 작가도 현대미술과 디자인에 맞는 재료와 쓰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장인과 작가를 ‘뿌리와 꽃’에 비유했다. 그는 “작가의 창의적인 수요가 장인의 지속적인 생산을 이끌고 장인의 기술이 작가의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며 “전통을 지키는 수직적 보존과 쓰임을 넓히는 수평적 확장이 함께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장인과 젊은 작가가 기술과 아이디어를 나누는 교육·창작 스튜디오, 한지의 물성과 가공법을 기록하는 아카이빙을 제안했다. 등재가 전승의 마침표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유라 교수 작품 '기억이 자라는 사과나무'

▲ “한지를 낡은 숙제가 아닌 디자인 플랫폼으로”

20여 년간 후학을 길러온 이 교수는 한지의 미래를 위해 재료 표준화와 융복합 교육, 창작이 수익으로 이어지는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젊은 세대에게 한지를 ‘지켜야 할 낡은 숙제’로 강요하는 순간 미래는 단절된다”며 “2030세대에게 한지는 어떤 인공 소재보다 힙하고 독보적이며, 무한한 확장이 가능한 트렌디한 디자인 플랫폼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한지의 두께·강도·가공법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닥섬유 칼라믹스를 3D 프린팅과 디지털 제작기술, 친환경 신소재 연구에 연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청년 작가가 자립할 수 있도록 창작지원금과 창업·브랜딩·해외 진출 지원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봤다.

이 교수는 오는 13일부터 18일까지 전주 교동미술관에서 개인전 ‘내 삶의 마시멜로는 한지였다’를 연다. 삶의 여정을 ‘피어나다’·‘탐하다’·‘홀로 웃다’라는 세 연작으로 풀어낸다.

그는 “나의 한지는 마시멜로우”라며 “한지는 천년을 버티는 질긴 생명력을 품으면서도 손끝에서는 말랑하게 형태를 내어주고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세계인이 한지를 동양의 오래된 종이로만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흙과 나무, 햇빛과 물을 거스르지 않고 만들어져 삶의 고단함과 상처를 품고 위로를 건네는 따뜻한 치유의 문화로 기억해주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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