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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벚꽃 흩날리는 뚝방길 아래 '서울 책보고' 그리고 꽃보고

퇴임 후엔 AI를 통해 현자·석학들과 대화하며 차별화 전략·리더십 해법을 탐색하는 을 창안, 관련 저작권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 독창적 AI활용 방법론을 기반으로 기업과 기관에 및 등을 하고, 뉴스버스에...

벚꽃 흩날리는 뚝방길 아래 '서울 책보고' 그리고 꽃보고

[지혜의 숲을 찾아서㊳]

낡은 창고에서 국내 최초 공공 헌책방으로, 송파 ‘서울책보고’

최근 봄이 절정 달해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날 송파둘레길을 걸었다. 벚꽃터널 아래로 노란 개나리가 넘치듯 피어나고, 짹짹거리는 새소리에 맞춰 걷는 발걸음은 한없이 경쾌했다. 보통은 개나리가 질무렵 벚꽃이 만발해지는데, 이곳은 서로 함께 핀 것이 장관이었다. 그 길 아래 잠현 초등학교와 파크리오 아파트 단지가 병풍처럼 둘러싼 곳에 거대한 콘테이너 건물이 하나 눈에 띄었다.

지하철 2호선 잠실나루역에서 내려오면 바로 닿는 곳, 신천유수지 주차장과 맞붙어 있는 투박한 컨테이너 형태의 가건물. 외관만 보아서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콘테이너형 창고 같은 이 공간에 큰 기대 없이 발을 들여놓았다가, 서울 한복판에 숨겨진 거대한 보석을 발견했다.

오래된 창고, 거대한 책의 웜홀(Wormhole)이 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밖에서 보던 투박한 컨테이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거대한 철제 아치가 굽이치며 끝없이 이어지는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영화 속에서나 보던 시공간을 넘나드는 ‘웜홀(터널)’ 한가운데로 쑥 빨려 들어온 기분이었다.

서울 송파구 신천동 서울책보고 도서관 내부. (사진=김희연)

이곳은 본래 텅 비어있던 대형 물류 창고였다. 한때는 차량과 물류가 쉼 없이 오가던 공간이었지만, 도시의 흐름이 바뀌면서 기능을 잃고 방치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 거대한 창고에 다시 숨을 불어넣은 것은 ‘헌책’이었다.

서울시는 흩어져 있던 동네 헌책방들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 속에서, 흩어진 책들을 모아 하나의 큰 서가로 만들고, 헌책이라는 느린 시간을 시민의 일상 속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서울 책보고'를 기획했다고 한다.

이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는 기존 창고의 거대한 구조를 지우지 않고, 오히려 그 ‘비어 있음’을 최대한 살리는 길을 택했다. 벽을 세우고 방을 나누는 대신, 하나의 긴 흐름 속에서 책이 물처럼 이어지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철제 아치 구조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뻗은 철제 아치의 ‘책 동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건축가는 책장을 곧은 벽이 아니라 ‘굽은 터널’로 만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책을 읽는 일은 직선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이야기와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과도 같기 때문이라고”

그래서인지 이곳을 걷다 보면, 한 권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 또 다른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각 출판사들이 자신들의 대표 서적들과 출판사 이름의 의미를 설명하며 큐레이션한 책들은, 공간과 묘하게 공명하고 있었다.

서울책보고 도서관 내부. (사진=김희연)

취향을 큐레이션 하는 책의 숲

동굴 같은 메인 서가를 둘러싸고, 공간 곳곳에는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 세심한 기획들이 숨어 있다. 우측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책과 함께하는 친구들을 모아둔 ‘취향 상점’이 나타난다. 감성적이고 지속 가능한 가치를 담은 굿즈들. 책갈피, 메모 노트, 사각거리는 연필과 필통, 엽서들이 전시된 이 공간에서 책과 어울릴 굿즈들이 이렇게 다양한 것에 놀라게 된다.

왼쪽 서가에는 유명인들이 추천하는 책들과 출판사별로 정성스럽게 큐레이션 해놓은 테마 도서들이 진열되어 있다. 과학책들이 가지런히 놓인 기획 서가에는 “이 책에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집에서 절대로 시도하지 마세요”라는 글이 붙어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

내가 나를 무시하고 산 게 잘못했다.” — 팔순 시인 할머니의 울림

수많은 책 사이를 유영하던 내 발걸음을 오래도록 멈춰 세운 것은, 어느 특별한 큐레이션 코너에서 만난 얇은 시집 한 권이었다. 황보출 시인. 한평생을 ‘까망눈’으로 살며 8남매를 키워낸 할머니가, 칠십이 넘어 푸른 어머니 학교에서 처음 한글을 배우고 초등학력을 인정받은 뒤 펴낸 책이었다. 삐뚤빼뚤하지만 꾹꾹 눌러쓴 할머니의 손글씨와 직접 그린 투박한 선인장 그림. 그 페이지를 넘기다 나는 한 문장 앞에서 숨을 멈췄다.

“내가 나를 무시하고 산 게 잘못했다. 늙어 보니 지금 알겠다.”

칠십이 넘어 한글을 깨친 황보칠 할머니가  펴낸 책. (사진=김희연)

세상 어떤 화려한 수사학이 이토록 가슴을 치는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욕심 없이 살아온 팔순 할머니의 생애가 응축된 이 날것의 문장은, 수많은 장서가 뿜어내는 무게보다 훨씬 더 묵직하게 내 마음의 정곡을 찔렀다.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타인의 시선에 맞추느라 정작 ‘나’를 무시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저절로 묻게 된다. 오늘 내 마음을 친 가장 빛나는 문장이었다.

손으로 마음을 따라가는 시간, ‘필사적’ 할머니의 문장이 준 여운을 안고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가니 ‘필사적’이라는 이름이 붙은 독특한 공간이 나타났다. 공간을 분리하듯 하얀 천이 차분하게 내려와 있는 이곳은, 오롯이 필사와 사색만을 위한 전용 공간이다.

“손으로 따라 쓰며, 마음을 따라가는 시간.” 안내판의 문구처럼, 나무 책상 위에 놓인 몽당연필을 쥐고 누군가 남겨둔 문장을 필사하다 보면 조용히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눈으로 휙휙 넘기는 독서가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문장을 내 것으로 소화하는 아주 밀도 높은 시간이다.

무거운 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추억을 돋게 하는 만화책 코너도 있다. 진지함과 재미가 단짠 단짠 하듯, 출판사들의 책들을 둘러보는 묘미가 꽤 좋다. 책 전시장을 죽 둘러보고 반대편으로 걸어가니, 전면 통 유리창을 향해 형형색색의 푹신한 빈백 소파들이 널브러져 있는 휴식 공간이 나온다.

서울책보고 도서관 내부. (사진=김희연)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편안해 보인다. 이 널찍한 창가 역시 우연히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었다. 폐창고의 두꺼운 외벽을 일부 열어 햇빛이 깊숙이 스며들도록 설계한 이유는, 책을 ‘전시된 물건’이 아니라 ‘머무는 시간’으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햇살 아래 몸을 기댄 채 책을 읽는 풍경 자체가 이 공간의 완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단순히 책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시간과 취향을 보존하는 거대한 저장소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직선의 벽 대신 굽이치는 아치형 서가를 만든 것도, 책과 책 사이를 ‘걸어 들어가는 경험’ 자체를 하나의 여행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거대한 책의 웜홀을 빠져나와 다시 봄날의 뚝방길로 나섰다. 책 동굴에 흠뻑 빠져 있다 나와서인지, 벚꽃과 개나리와 파란 하늘이 더 또렷하고 강렬하게 들어왔다. 마침 뚝방길에도 벚꽃과 개나리가 서로 어깨를 맞대고, 책 동굴처럼 좁은 길을 만들어 두고 있었다.

서울책보고 도서관 주변 벚꽃터널의 뚝방길. (사진=김희연)

책 동굴에서 꽃 동굴로 이어지는 걸음. 종이로 엮은 시간의 터널을 지나, 계절이 만든 또 하나의 터널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

책보고(寶庫), 꽃보고. 하루가 책과 꽃과 보람으로 가득찬 기분이다.

김희연

은 기업전략 컨설턴트다. 씨티은행과 유수 증권사의 IT애널리스트를 거쳐 LG디스플레이 최고전략책임자(CSO)에 올랐다. 금융·증권·IT·제조 분야를 아우르는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 MI·신사업 발굴·IR을 총괄했다. 퇴임 후엔 AI를 통해 현자·석학들과 대화하며 차별화 전략·리더십 해법을 탐색하는 <AI스토밍(AI-Storming) 방식> 을 창안, 관련 저작권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 독창적  AI활용 방법론을 기반으로 기업과 기관에 <전략 컨설팅> 및 <AI 강의> 등을 하고, 뉴스버스에 'AI시대 인(人)사이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감지능시대>와 최근 출간된 <리더는 AI에게 질문하지 않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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