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단순 제조업인가, 아니면 국가안보 자산인가."
삼성전자 노조의 총파업 가능성이 커지면서 한국 사회가 처음으로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됐다.
과거 자동차·철강·조선업 파업은 산업 현장의 노사 갈등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금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은 차원이 다르다. AI 시대 핵심 인프라인 HBM(고대역폭메모리)과 첨단 메모리는 더 이상 단순 전자부품이 아니다.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자율주행, 군사용 AI, 사이버전까지 움직이는 핵심 전략 자산이 됐다.
미국과 중국, 유럽은 이미 반도체를 사실상 ‘준(準)국가안보 산업’으로 다루고 있다. 반면 한국은 세계 최대 메모리 강국이면서도 여전히 반도체를 민간 제조업 프레임 안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미국은 이미 '반도체=안보' 선언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2022년 ‘CHIPS and Science Act’를 통해 약 2800억달러 규모 반도체 지원 체계를 구축했다. 단순 생산 보조금 차원을 넘어 공급망 재편과 기술 패권 전략까지 포함된 국가 프로젝트다.
최근 미국 정부는 첨단 AI칩과 반도체 장비를 사실상 안보 통제 품목처럼 다루고 있다. 엔비디아 AI칩의 대중국 수출을 제한했고,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반입도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
백악관 역시 올해 공식 문건에서 “반도체는 미국의 16개 핵심 인프라 전 분야에 필수적”이라고 명시했다. 사실상 “반도체 공급망 유지가 곧 국가안보”라는 선언에 가깝다는 평가다.
최근 미국 의회에서 논의 중인 MATCH Act와 Chip Security Act 역시 중국의 첨단 반도체 접근 차단을 핵심 목표로 하고 있다. 반도체를 산업이 아니라 지정학 무기로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 중국도 '반도체 전시체제'
중국 역시 반도체를 국가 생존 산업으로 판단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 제재가 강화되자 중국은 막대한 국가 자금을 투입해 반도체 자립 체제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의 수출 통제가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자립 드라이브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은 최근 희토류 수출 통제까지 확대했다. 첨단 메모리 생산에 필요한 희토류 소재를 국가 통제 대상으로 묶으며 공급망 압박 카드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반도체 공급망 자체가 이미 국가 간 전략 충돌 영역으로 진입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유럽도 ‘칩스법 2.0’ 추진
유럽연합(EU)도 뒤늦게 반도체 자립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EU는 최근 ‘Chips Act II’를 추진하며 반도체 공장 직접 투자 확대까지 검토 중이다. 네덜란드의 ASML 역시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기조에 사실상 동참하고 있다.
과거 자유무역 논리로 움직이던 반도체 산업이 이제는 각국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경제안보 산업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한국만 여전히 ‘민간기업 프레임’
반면 한국은 아직 과도기적 상태라는 평가가 많다. 정부는 반도체를 국가첨단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세제 지원과 기술 보호를 강화하고 있다. 실제 한국은 ‘국가첨단전략산업법’을 통해 반도체와 배터리 등을 전략산업으로 규정하고 정책금융 지원도 확대 중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민간기업 노사 문제' 프레임이 강하다.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이 흔들려도 법적으로는 일반 제조업 노사분쟁 구조 안에서 움직인다. 현재 반도체 산업은 필수공익사업이나 필수유지업무 업종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문제는 글로벌 현실이 이미 한국 제도를 앞서가고 있다는 점이다. HBM과 첨단 메모리는 이제 AI 산업의 심장 역할을 한다. 미국 빅테크와 글로벌 데이터센터 기업들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공급 일정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 미국과 유럽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을 단순 협력업체가 아니라 전략 공급망 파트너로 보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대표교섭위원인 김형로 부사장(왼쪽 사진)과 최승호 초기업노조 삼성전자지부 위원장이 13일 새벽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중앙노동위원회에서 2026년 임금협약 체결을 위한 2차 사후조정이 결렬된 후 협상장을 각각 떠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출처=연합]
◆"21세기 석유는 반도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21세기 반도체는 20세기 석유와 같은 위치에 올라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과거 원유가 산업의 혈관이었다면 이제는 AI칩과 메모리가 디지털 경제의 혈관이라는 의미다. AI 서버와 자율주행, 군사용 AI, 양자컴퓨팅, 클라우드, 사이버전까지 첨단 반도체 없이는 작동이 어렵다.
실제 미국은 중국으로의 AI칩 유출을 국가안보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최근 중국 경쟁업체로 DRAM 기술을 유출한 전 삼성전자 연구원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해당 기술을 ‘국가 핵심 기술’로 판단했다.
반도체가 더 이상 단순 기업 영업비밀 수준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안보를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업계에서는 이번 삼성전자 노사 갈등은 단순 임금협상을 넘어선 상징성을 갖는다고 보고 있다. AI 시대 핵심 전략산업을 기존 제조업 논리만으로 관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처음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반도체를 국가안보 산업으로 본다고 해서 곧바로 파업 제한이나 국가 통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권 침해 논란 역시 불가피하다. 다만 미국과 중국, 유럽이 모두 반도체를 경제안보 자산으로 격상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과거 제조업 프레임에 머물 경우 장기적으로 국가 전략체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세계는 이미 '반도체 전쟁' 체제로 들어갔다. 이제 한국 역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국가 전략자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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