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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박윤정의 위클리투어] 맥주로 읽는 '뉴욕'…도시를 마시다

뉴욕을 이해하는 방법은 많다. 누군가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도시의 정신을 찾고, 누군가는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뉴욕의 에너지를 발견한다. 이번 여행에서 선택한 렌즈는 조금 달랐다. 맥주였다.

[박윤정의 위클리투어] 맥주로 읽는 '뉴욕'…도시를 마시다

도니노 파크. 사진=박윤정 민트투어 대표

뉴욕을 이해하는 방법은 많다. 누군가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도시의 정신을 찾고, 누군가는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뉴욕의 에너지를 발견한다. 이번 여행에서 선택한 렌즈는 조금 달랐다. 맥주였다. 한 잔의 맥주에는 그 지역의 물과 농산물, 사람들의 취향과 역사, 그리고 시대의 분위기가 담긴다. 그렇다면 오늘날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중심지인 브루클린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 질문을 품고 맨해튼을 뒤로한 채 브루클린으로 향한다.

◇ 강 건너 보이는 도시의 기억

아침의 도미노 파크는 고요했다. 이스트강 위로 잿빛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강 건너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은 흐린 하늘 아래 수묵화처럼 번져 있었다. 지금은 시민들이 산책하고 조깅을 즐기는 공원이지만 이곳은 원래 미국 최대 규모 설탕 정제 공장이 있던 자리다. 19세기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민자가 들어오던 도시였다. 독일과 아일랜드, 이탈리아와 동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부두와 공장, 철도와 창고에서 일하며 뉴욕을 세계 최대 산업 도시로 성장시켰다.

브루클린 역시 당시에는 노동자의 도시였다. 오늘날 세련된 카페와 브루어리가 들어선 윌리엄스버그는 원래 공장과 창고가 가득했던 산업 지대였다고 한다. 도미노 파크에 남겨진 녹슨 철 구조물은 그 시대의 흔적이다. 도미노 파크를 걷다 보면 도시 재생이 단순한 개발 사업이 아니라 기억을 보존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의 한가운데에는 맥주가 자리한다. 이민자들이 가져온 맥주의 도시, 지금 미국 맥주의 상징은 IPA지만 원래 미국은 맥주의 나라가 아니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마시던 술은 위스키였다. 미국 맥주 문화의 시작은 독일 이민자들이었다.

1848년 독일 혁명 이후 수많은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했고, 맥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고향을 기억하게 해 주는 문화였다. 뉴욕의 맥주 역사는 결국 이민자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한 잔의 맥주 안에는 수많은 언어와 문화가 함께 발효되고 있었던 셈이다.

브루클린 브루어리. 사진=박윤정 민트투어 대표

◇ 금주법이 남긴 상처

1920년 시작된 금주법으로 술의 제조와 판매가 금지되면서 수천 개의 양조장이 문을 닫았다. 독일계 이민자들이 세운 브루어리 대부분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3년 뒤 금주 법은 폐지됐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살아남은 대형 기업들이 시장을 독점했고, 미국 맥주는 점점 획일화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브루클린을 보고 있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다. 혁명은 차고에서 시작됐다. 작은 차고와 지하실에서 시작된 실험은 곧 크래프트 맥주 혁명으로 이어졌다.

◇ 새로운 세대의 등장

도미노 파크를 지나 ‘Other Half Brewery’에 도착한다. 문을 여는 순간 망고와 패션프루트, 자몽 향이 공기를 가득 채운다. 독일 이민자들이 만들던 라거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이것은 현대 미국 크래프트 맥주가 만들어낸 새로운 언어다. Other Half는 지금 세계 IPA 문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

강렬한 홉 향과 부드러운 질감, 그리고 끊임없는 실험. 하지만 이곳에서 더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이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와 노트북을 펼친 직장인, 강아지를 데리고 온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브루어리는 술집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거실처럼 기능한다. 맥주를 마시는 문화 자체가 뉴욕의 라이프스타일이 된 것이다.

브루클린 브루어리. 사진=박윤정 민트투어 대표

◇ 브루클린이라는 실험실

윌리엄스버그에서 부시윅으로 이동하자 풍경은 다시 달라진다. 그래피티가 가득한 거리, 폐공장을 개조한 스튜디오, 젊은 예술가와 창업가들. 창조 산업의 도시다. ‘Eckhart Beer Co.’에서는 지역 공동체의 따뜻함을 만났고, ‘KCBC’에서는 예술과 디자인이 맥주와 만나는 현장을 봤다.

맥주는 이들에게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창작의 재료이자 문화적 표현 방식이다. ‘The Test Brewery’에서는 그 흐름이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실험과 도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뉴욕이 금융과 예술, 패션과 음식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이유도 결국 같은 정신 때문일 것이다.

◇ 맥주가 문화가 되는 곳

브루클린 브루어리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달라진다. 젊은 혁신가의 공간이라기보다 이제는 역사가 된 공간에 가깝다. 브루클린 라거를 한 잔 주문한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깊이가 있다.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브랜드만이 가질 수 있는 품격이 느껴진다. 혁신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전통이 된다. 브루클린 브루어리는 그 사실을 증명하는 장소였다.

해가 기울 무렵 ‘TØRST’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전 세계 맥주가 모여 있다. 벨기에 수도원의 에일, 덴마크의 실험적 맥주, 미국 서부의 IPA까지…. 놀라운 것은 모두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뉴욕 역시 그렇다. 세계 200개가 넘는 민족이 살아가는 도시다.

다양성이야말로 뉴욕의 가장 큰 자산이다. 맥주 역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할 때 가장 풍요로워진다. TØRST의 탭에 연결된 수십 종의 맥주는 어쩌면 뉴욕 그 자체를 상징하는 풍경인지도 모른다.

창밖으로 브루클린의 저녁이 내려앉는다. 그래피티가 그려진 벽, 옛 공장을 개조한 갤러리, 브루어리에서 흘러나오는 웃음 소리, 그리고 강 건너 반짝이는 맨해튼의 불빛.

이번 여행에서 맥주를 마신 것이 아니라 뉴욕이라는 도시를 천천히 음미했다. 도미노 파크에서는 산업화의 흔적을 봤고, 브루클린 브루어리에서는 금주법 이후 되살아난 미국 맥주 문화의 역사를 만났다. Other Half에서는 혁신을, Eckhart에서는 공동체를, KCBC에서는 창조성을, The Test Brewery에서는 미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도시의 맛은 IPA처럼 화려하면서도 라거처럼 깊고, 수백 개 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뉴욕처럼 다채롭고 자유로웠다. 한 잔의 맥주가 도시를 설명할 수 있을까? 브루클린의 밤을 걸으며 내린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좋은 맥주는 결국 좋은 도시를 닮는다. 그리고 뉴욕은 지금도 쉼 없이 발효 중인 거대한 브루어리였다.

박윤정 민트투어 대표 pyj@minttou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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