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전망은 82 달러에 묶였지만 시장은 110 달러… 선물곡선 전 구간 상방 이동
-헬륨(카타르 64.7%)·브롬(이스라엘 97.5%) 의존 구조… 6주면 반도체 공정 멈춘다
중동 분쟁 직후 호르무즈 해협 통과 선박 수는 급감했고, 주요 공항 운항도 동시에 위축됐다. 같은 시기 원유·천연가스 가격은 급등하고 선물 곡선은 전 구간 상방 이동했다. 물류·에너지·금융이 동시에 흔들리는 ‘복합 공급망 충격’이 현실화됐음을 보여준다. [자료=IMF]
국제통화기금(IMF)이 17일 ‘중동·중앙아시아 지역경제전망 업데이트’를 내놨다. 시장의 시선은 MENAP 성장률 1.4%, 걸프 5개국 역성장 같은 숫자에 머물렀다. 그러나 보고서를 한국 산업의 공급망 구조 위에 겹쳐 읽으면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난다. 지금 드러난 것은 단순한 경기 둔화가 아니다. 한국 제조업의 작동 방식 자체를 흔드는 구조적 위험이다.
이날 IMF에 따르면, ‘기준 시나리오’가 전월 10일 기준 원유 선물 가격을 토대로 짜였다. 전쟁 충격이 올해 중반까지 완화되고, 유가가 연평균 배럴당 82 달러로 수렴한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 전제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휴전 합의 이후에도 미군은 병력과 함정을 증파하며 ‘역봉쇄’ 작전을 이어가고 있고, 이란은 홍해 봉쇄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유럽 주도의 호르무즈 통항 협의가 긴급히 열리는 상황 자체가 해협 정상화와 거리가 멀다는 방증이다.
IMF도 이를 외면하지 못했다. 보고서 본문에는 “에너지 인프라 피해가 확대되며 올해 중반 정상화 기대는 점점 실현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다”는 문장이 들어 있다. 실제로 전월 10일 기준 유가 선물 곡선은 하향 안정 경로를 가리켔지만, 이달 6일 곡선은 전 구간이 상방 이동했다. 시장이 이미 공급 차질의 장기화를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IMF가 제시한 세 가지 시나리오 가운데 유가 82달러를 전제로 한 기준 시나리오는 더 이상 현실 설명력을 갖기 어렵다. 연평균 110달러를 가정한 ‘보다 심각한 시나리오’가 오히려 현실에 가까운 경로가 됐다. 이 경우 글로벌 성장률은 2.6%로 낮아지고 물가는 5%를 넘는다. 에너지 인프라 피해가 더 커질 경우 성장률 2%, 물가 6%라는 조합도 시야에 들어온다. 지금 시장이 반영하는 것은 이미 그 어두운 경로다.
분쟁 직후 요소 가격은 최대 160선까지 치솟으며 약 60% 이상 급등한 반면, 알루미늄은 상승 후 하락세로 전환됐다. 전쟁 충격은 원유보다 먼저 비료·중간재에서 폭발하고, 그 영향은 더 오래 남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자료=IMF]
문제는 원유 가격 자체가 아니다. 걸프협력회의(GCC) 국가들이 황, 암모니아, 질소 비료 등 중간재 공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다. 이 대목을 한국 산업 구조에 대입하면 위험의 성격이 또 바뀐다. 에너지가 아니라 중간재 공급망이 진짜 뇌관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헬륨이다. 반도체 공정에서 노광 장비 냉각, 웨이퍼 검사, 불순물 제거에 필수적인 가스다. 한국은 수입의 64.7%를 카타르에 의존한다. 카타르는 세계 공급의 30% 이상을 담당하는데, 헬륨은 LNG 생산 과정에서 추출된다. 라스라판 LNG 단지가 타격을 입으면서 헬륨 생산도 동시에 멈췄다.
복구에는 최소 3년, 길게는 5년이 걸린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판단이다. 문제는 재고다. 헬륨은 저장과 운송 특성상 약 6주 수준밖에 비축이 어렵다. 재사용 기술은 소비를 줄일 뿐 공급 자체를 대신하지 못한다.
브롬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다. 반도체 식각 공정에 쓰이는 핵심 소재로, 한국은 수입의 97.5%를 이스라엘에 의존한다.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브롬화수소산 역시 원료는 이스라엘산이다. 전쟁 당사국에 사실상 전량을 기대고 있는 구조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연합뉴스
이 두 소재의 공급 차질이 6주 이상 이어지면 반도체 생산라인은 직접적인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 헬륨 가격은 이미 최대 200% 상승 가능성이 거론된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생산 차질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석유화학도 예외가 아니다. 나프타 가격은 연초 대비 두 배 가까이 뛰었고, 국내 주요 석유화학 단지는 가동률이 50~60% 수준까지 떨어졌다. 비축 물량은 약 2주분에 불과하다. 5월 중순 전후 셧다운 가능성이 언급되는 이유다. IMF가 말한 비료·화학 중간재 공급 교란은 이미 한국 산업 내부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IMF가 제시한 유가 민감도 공식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원유 가격이 10% 오르면 성장률은 0.5%포인트 하락하고 물가는 1%포인트 상승한다는 추정이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더 높다. 실제로 두바이유 기준 약 77% 상승 구간에서 국내 연구기관은 성장률 0.8%포인트 하락, 물가 2.9%포인트 상승을 제시했다.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 장기 분쟁이 남기는 ‘흉터’까지 겹친다. IMF는 과거 사례를 분석해 분쟁 5년 후 1인당 소득이 기존 추세 대비 약 15% 낮아졌다고 봤다. 중동 국가의 재정 여력 축소는 건설·플랜트 발주 감소로 이어진다. 실제로 올해 1분기 한국 건설사의 중동 수주는 90% 가까이 줄었다.
유가 10% 상승 시 성장률은 약 0.5%포인트 낮아지고 물가는 약 1%포인트 상승한다. 에너지 충격이 곧바로 ‘저성장·고물가’로 이어지는 구조적 리스크가 이미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료=IMF]
역설도 있다. 파괴된 인프라는 결국 복구된다. IMF는 하루 1000만 배럴 이상의 생산능력이 손실됐다고 추산한다. 복구 비용은 최소 수십조 원 규모다. 과거 시공 경험을 가진 한국 건설사에는 기회가 된다. 다만 생산과 수출이 동시에 막힌 국가들은 발주 여력이 제한될 수 있다. 단순 시공 능력이 아니라 금융 패키지까지 결합한 제안이 요구되는 이유다.
IMF가 짧게 언급한 또 하나의 변수는 담수화 인프라다. 걸프 국가들은 수자원의 40% 이상을 해수 담수화에 의존한다. 이 시설이 타격을 입으면 에너지 문제는 곧장 인도적 위기로 번진다. 동시에 담수화 설비의 이중화와 분산 투자가 확대될 가능성도 커진다.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에는 새로운 시장이 열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보고서는 숫자보다 구조를 읽어야 한다. 기준 시나리오는 이미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고, 중간재 공급망은 단일 국가와 단일 경로에 과도하게 묶여 있다. 재건 수요는 존재하지만 자금은 불안정하다.
원유는 대체 수입선이 있다. 그러나 헬륨과 브롬은 다르다. 특정 국가에 60~90% 이상 의존하는 구조에서는 대체가 곧바로 작동하지 않는다. 라스라판 복구에 5년이 걸린다면, 이번 충격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가격 대응이 아니라 구조 재설계다. 공급망을 나누고, 중간재 의존을 낮추고, 운송 경로를 다변화하는 문제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충격은 유가보다 공정이 멈출 수 있다는 공포에서 시작된다”며 “공급망을 다시 짜지 않으면 다음 위기는 더 빨리 닥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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