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KBS 2TV ‘다큐멘터리 3일’ ‘처음 만난 세계–SK하이닉스 이천 72시간’ 방송화면 캡처
[AP신문 = 이상민 기자]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한 구성원의 책상 위에는 감자 모형 하나가 놓여 있다. 입사 초기 할 줄 아는 일이 많지 않아 선배들 옆에서 장비를 켰다 껐다 하며 멍하니 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감자 같아서' 두고 본 물건이다.
그는 '왜 이거밖에 못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감자를 보고 ‘저거보다 낫지’라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지난 11일 방송된 KBS 2TV ‘다큐멘터리 3일’의 ‘처음 만난 세계–이천 SK하이닉스 72시간’ 편은 AI 반도체 산업의 중심에 선 SK하이닉스를 성과의 숫자가 아닌, 실패와 불안, 긴 터널을 지나온 구성원들의 말과 표정으로 조명했다.
◆ 감자보다 조금 나아진 오늘
점심시간에도 자리에서 삼각김밥과 바나나로 끼니를 때우며 일하는 모습은 첨단 반도체 현장의 빠른 호흡을 보여줬다.
4년 차인 한 구성원은 지금도 회사에 있으면 긴장한다고 했다. 그에게는 회사에 오기 전 실패의 시간이 있었다. 스타트업에서 앱 플랫폼을 만들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고, 자책과 불안으로 밤을 보낸 날도 있었다. 그 어두운 시간을 지나 SK하이닉스에 입사했고, 거대한 조직과 정교한 시스템, 뛰어난 동료들이 함께 움직이는 현장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사진 = KBS 2TV ‘다큐멘터리 3일’ ‘처음 만난 세계–SK하이닉스 이천 72시간’ 방송화면 캡처
그는 앞으로도 '또 터널이 오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있다면서도 “언젠가 올 거고, 오면 또 잘 지나가야지”라고 강조했다. 감자처럼 아무것도 못 한다고 느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조금 나아졌죠. 이 친구보다는”이라고 웃을 수 있게 된 셈이다.
◆ 실패해도, 안 하는 것보다 해보는 사람들
희망은 개인의 회복력에만 머물지 않았다. SK하이닉스의 HBM(고대역폭 메모리) 경쟁력 역시 실패 가능성을 감수한 현장의 시도 위에서 쌓였다.
불과 몇 년 전 반도체 시장이 침체됐을 때, 현장은 고객에게 시제품을 적기에 공급하기 위해 납기 소요시간(Turn Around Time·TAT)을 과감히 앞당겼다.
모두가 확신을 갖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한 구성원은 “남들이 안 하는 걸 저희 회사는 먼저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실패할 때도 있겠지만, 어쨌든 안 하는 것보다 우선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처음 만난 세계–이천 SK하이닉스 72시간’ 편의 핵심 정서와 맞닿아 있다. 실패하지 않는 길을 찾은 것이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먼저 해보고 다시 고치는 시간이 쌓였다는 의미다. 첨단 산업의 경쟁력은 때로는 정교한 계산보다 ‘우선 해보는’ 투박한 결단에서 시작된다.
◆ 확신은 없어도 희망은 놓지 않은 30년
사진 = KBS 2TV ‘다큐멘터리 3일’ ‘처음 만난 세계–SK하이닉스 이천 72시간’ 방송화면 캡처
또 다른 시니어 구성원은 HBM의 시작을 함께한 30년 차 엔지니어로 소개됐다. 최첨단 반도체 회사의 책상 위에 여전히 주판을 두고 있는 모습은 빠르게 바뀌는 기술 속에서도 오래 축적된 현장의 시간을 상징했다.
그는 “확신하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희망은 놓지 않았던 것 같아요”라고 역설했다.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제 자리를 지키면 언젠가 그만한 보상이 따를 것이라 믿었다는 설명이다.
최근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말에도 그는 담담했다. “제 자리에서 제 일을 했음에 주목받는다면 나쁘지 않은 주목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최고참 엔지니어의 말은 화려한 성과를 대하는 현장의 태도를 보여줬다. 누군가에게 주목은 갑작스러운 행운이 아니라, 오래 같은 자리에 머문 시간의 결과였다.
◆ 터널을 지나 일류를 만드는 원팀
이천캠퍼스는 매일 3만명이 오가는 대규모 반도체 생산 거점이다. 팹(Fab·Fabrication Facility) 안에서는 방진복을 입은 구성원들이 24시간 교대근무로 라인을 지킨다. 반도체 하나가 완성되기까지는 최소 4개월 이상이 걸리고, 수백 개 공정과 계측, 검증이 반복된다.
이 과정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장비를 개발하는 사람, 공정을 관리하는 사람, 불량을 분석하는 사람, 테스트를 담당하는 사람, 클린룸을 정돈하는 사람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누군가는 실패를 줄이고, 누군가는 병목을 찾고, 누군가는 작은 불량 하나를 끝까지 들여다본다.
출근길에 만난 한 구성원은 많은 사람이 함께 출근하니 외롭지 않다고 전했다. 작은 반도체 하나가 수많은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듯, 자신도 그 안의 작은 존재이지만 모두가 모여 반도체를 함께 만든다는 설명이다. 이것이 현장에서 말하는 ‘원팀’의 감각이다.
사진 = KBS 2TV ‘다큐멘터리 3일’ ‘처음 만난 세계–SK하이닉스 이천 72시간’ 방송화면 캡처
◆ 흔들리면서 단단해지는 사람들
반도체 산업은 늘 호황만 이어지는 곳이 아니다. 침체기도 있었고, 무급휴직이 있었으며, 다시 터널이 올 수 있다는 불안도 있다.
‘처음 만난 세계–이천 SK하이닉스 72시간’ 편에 등장한 구성원들 역시 그 불안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지나갈 것이라 믿었고, 다시 해보겠다고 말했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책상 위 감자를 보며 버틴 4년 차 구성원, 실패해도 먼저 해보자는 현장 리더, 확신보다 희망을 붙잡은 30년 차 시니어의 이야기는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즉 SK하이닉스의 일류 HBM 경쟁력은 완벽한 확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시간 위에 세워졌다.
0과 1의 차가운 숫자가 지배하는 반도체 세계 안에도, 실패를 지나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희망가가 있었다. 터널은 또 올 수 있지만, 이천캠퍼스의 사람들은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다음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