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장학금으로 등록금 전액을 감면받아 온 기초생활수급자 대학생 A(20) 씨는 최근 ‘인문 100년 장학금’ 장학생으로 선발됐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학교 장학팀으로부터 황당한 통보를 받았다. 인문 100년 장학금을 수령하려면 기존에 감면받은 국가장학금 300여만 원을 학교 계좌로 먼저 ‘현금 입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A 씨는 “돈이 없어서 장학금을 신청했는데, 장학금을 받기 위해 수백만 원을 먼저 빌려와야 하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며 허탈해했다.
장학금 선입금이라는 행정 장벽 앞에 좌절하여 캠퍼스 계단에 주저앉은 저소득층 대학생의 모습. 사진은 생성형 AI를 통해 제작했다(사진: 취재기자 정수민).
행정 편의주의에 가로막힌 ‘장학금 갈아타기’
교육부와 한국장학재단이 운영하는 ‘인문 100년 장학금’은 인문·사회과학 분야 우수 학생을 지원하는 제도다. 특히 기초생활수급자는 등록금 전액과 학기당 250만 원의 생활비를 지원받아 대학생들 사이에서 ‘꿈의 장학금’으로 불린다.
문제는 이미 국가장학금을 통해 등록금 0원 고지서를 받은 학생들이 이 장학금으로 전환할 때 발생한다. 중복 수혜 방지 원칙에 따라 기존 장학금을 취소해야 하는데, 국내 일부 대학에서 전산상 상계 처리 대신 학생이 직접 현금을 입금해 기존 장학금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몇백을 어디서...” 학생들 공분
대학 커뮤니티 ‘에브리타임’ 등에는 이와 유사한 고충을 토로하는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학생들은 “기수혜 장학금 반환이 전산 기록만 바꾸면 될 일인데, 굳이 고지서상 감면 금액을 다시 입금하라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루아침에 몇백만 원을 융통하는 게 쉬운 사람도 있겠지만, 안 되는 사람도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며 대학 행정을 비판했다. 입금한 돈이 다시 장학금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시차가 발생해, 당장 현금이 없는 저소득층 학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학자금 대출을 받거나 주변에 손을 벌려야 하는 실정이다.
인문100년 장학금 수혜자가 반환에 대한 불편함을 주장하고 있다(사진: 에브리타임 캡처).
재단과 대학 사이 ‘행정 칸막이’... 학생들만 발동동
한국장학재단 측에 확인한 결과, 장학금 반환 처리는 각 대학의 고유 권한인 것으로 나타났다. 재단 관계자는 “재단에서 지급한 장학금의 반환 처리는 학교에서 담당하며, 세부적인 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해당 학교에 문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재단 시스템상의 제약보다는 개별 대학의 행정 처리 방식에 따라 학생들의 부담이 결정되는 구조다. 대학들이 전산상 상계 처리 대신 현금 입금을 요구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면서, 당장 수백만 원의 목돈을 마련하기 어려운 저소득층 학생들은 행정의 유연성 부족으로 인한 불편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자격 상실자’는 반환 유예, ‘우수 장학생’은 입금 압박
‘2026년도 인문 100년 장학금 업무처리기준’에 따르면, 성적 미달이나 자퇴 등으로 장학금을 반환해야 하는 학생이 경제적으로 곤란할 경우 졸업 시까지 반환을 유예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반면, 더 나은 장학금으로 전환하려는 성실한 우수 학생들에게는 이러한 유예나 배려가 전무하다. 장학금을 뱉어내야 하는 상황보다, 신규 수혜를 원하는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셈이다.
국가장학금 수혜자 지원 제한하는 대학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예 지원 기회 자체가 박탈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일부 대학은 장학금 선발 공고에 ‘당해 학기 국가장학금 수혜자 지원 불가’ 혹은 ‘장학금 수혜 내역이 없는 학교 우선 선발’과 같은 조건을 명시하고 있다. 행정 처리가 까다롭다는 이유로 국가의 도움을 이미 받고 있는 저소득층 학생들을 선발 대상에서 아예 배제하거나, 현금 동원 능력이 없는 학생들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는 실태다.
국가장학금 전액 수혜자는 신청이 불가하다는 인문 100년 장학금 선발 공고문이다(사진: A 대학교의 장학금 게시글 캡처).
재단과 대학 사이 ‘행정의 벽’... 시스템 개선만이 해법
결국 인문 100년 장학금을 둘러싼 ‘선입금 논란’은 특정 기관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기보다, 재단의 지침과 대학의 행정 시스템이 맞물리지 못해 발생한 구조적 문제에 가깝다. 재단은 대학에 반환 처리의 자율성을 부여했지만, 정작 대학 현장에서는 전산상 상계 처리 등의 유연한 방식을 도입할 여력이 부족해 학생들에게 현금 입금이라는 가장 단순한 방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학금 수혜내역이 없는 학생을 우선선발한다는 내용의 인문 100년 장학금 선발 공고문이다(사진: B 대학교의 장학금 게시글 캡처).
이러한 ‘행정의 칸막이’ 속에서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저소득층 학생들만 장학금 수혜를 포기하거나 일시적인 빚쟁이로 내몰리는 모순이 반복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재단과 대학이 긴밀하게 전산을 연동하여 학생이 직접 목돈을 융통하지 않아도 장학금 전환이 가능하도록 하는 ‘원스톱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인재를 키우겠다는 장학금의 본래 취지가 복잡한 행정 절차에 가로막히지 않도록, 이제는 학생 중심의 제도적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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